魔王 - 馬脚 이 소설의 모든 노래는 紫雨林의 "마왕"을 인용하였습니다. -馬脚- ============================================================================ ★★프롤로그☆☆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슬픈 사랑에만 빠지도록 설정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도 슬픈 결말로만 끝나 버리도록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어. I. 축제의 날 형형색색으로 거리의 벽돌을 물들이고 있는 오색등.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흥겨운 음악. 사람들로 북적대는 광장에서 엄마를 찾아 울고 있는 아이. 끼리끼리 모여서서 깔깔대는 처녀들. 그 처녀들을 곁눈질하는 한껏 멋을 낸 청년들. 아직의 두 개의 달이 떠오르기 전이건만 초저녁 술로 얼굴이 불콰해진 아저씨들. 술렁대고, 시끌시끌한, 흥겨우면서도 어수선한 축제의 분위기. 혹시 니브市를 스쳐 지나는 여행자라면 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일정을 변경하고 서라도 니브市에 머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자신이 묵고 있는 여인숙의 유난히 눈이 맑은 한 아가씨에게 마음이 끌리고, 또 그 아가씨가 좀처럼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음에 절망하여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거나, 혹은 니브市의 중앙에 위치한 이리안느 궁 주위를 맴돌다 운이 좋다면 니브市의 주인이자 아름다운 에모리 공국의 국왕부부를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물론 하는 일 없이 왕성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근위병에게 눈총을 받거나 심하면 취조를 당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지만 말이다.) 주의력이 유난히 깊은 여행자라면 집집마다 문 앞에 매달아 놓은 붉은빛의 수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해 하기도 할 것이다. 부자집에는 티없고 큰 고급 수정이, 형편이 모자란 집에는 작은 수정 조각이, 에모리의 집집마다 수정을 집 앞에 내걸지 않은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붉은 수정, 그것은 유난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많은 니브市의 특산품이자 에모리 공국의 수호석이기도 하였으며(그래서 에모리 국왕의 왕관에 저토록 커다란 붉은 수정이 박혀 있는 것이다)... ... ... ... ... 한편으로 <마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신이 만약 니브市의 누군가에게 <마왕>이라는 단어를 꺼낸다면 당신은 실로 다양한 반응을 보게될 것이다. 흠칫 몸을 떨고 경외감을 표시하는 노파에서부터 눈물을 흘리는 아낙, 당신에게 덤벼듦으로써 분노를 표시하는 술에 취한 청년, 그 청년을 표정없이 바라보는 아가씨... ... 하지만, 이들의 반응 중 분명한 하나는 그들이 <마왕>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에 까닭 모를 수심이 드러난다는 것. 아니 수심이라기보다는 공허한 슬픔이라는 말이 옳을까... ... 어쨌거나 니브市의 축제는 바로 그 <마왕>을 위한 축제였으며, 에모리의 국민들은 매년 이리안느 궁성 근처의 릴리아 광장에서 펼쳐지는 마왕에의 제의에 참가하기 위해 에모리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것이었다. 갑자기 릴리아 광장에 모인 인파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마왕에의 제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온통 붉은 수정과 이웃 카센국에서 수입되는 최고급 갑사로 장식된 광장으로 국왕부부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비병들의 눈초리는 더욱 삼엄해지고, 에모리의 국민들은 지난 30년간 에모리를 평화롭게 다스린 국왕 내외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땅에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왕에게 경하드립니다" 혹은 "포프 폐하 만세!"와 같은 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국왕은 그쪽을 향해 미소를 짓거나 손을 들어올려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왕의 곁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여인, 에모리 공국의 왕비는 국왕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밀납인형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앞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는데, 마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광장 가운데로 이어진 붉은 융단을 따라 걸어간 국왕 내외가 이윽고 마왕의 신전에 도착했다. 오직 몇몇의 선택받은 왕족과 성직자들만이 허락된 마왕의 신전에서 마왕에의 제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돌로 된 신전을 울리는 규칙적인 북소리. 그에 맞춰 마왕에게 바쳐지는 꽃과 음식들. 젊은 처녀들의 춤이 이어지고 이윽고 신전 앞에 모여든 군중의 시끌거림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되듯 잦아들자 신전의 오른쪽 입구에서 어슴프레한 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붉은 갑사로 만든 옷을 입은 한 소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II. 마왕에의 제의 "셔릴님이시다! 아름답기도 하시지!" 군중들 사이에서 한결같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붉은 옷의 소년이 신전 중앙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며 입술을 열자 꿈결같은 노랫자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별다른 리듬이나 가락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듯 시작된 노래는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혼을 빼앗듯 그들의 귀를 점령해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슬픈 사랑에만 빠지도록 설정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도 슬픈 결말로만 끝나버리도록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어. 긴 긴 기도로 기원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는 않아주었어. 그들은 매일 눈믈을 흘려. 그 눈은 마치 호수와 같아. 그러나 두 눈을 잃어도 슬픈 사랑만은 않기를, 슬픈 사랑만은 않기를, 슬픈 사랑만은 않기를. 그들은 매일 기도했어, 기도했어. 님을 잃고, 맘을 잃고, 시름을 얻어, 영원토록..."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듯 셔릴이라는 이 소년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불과 15~16세 남짓한 은발의 소년.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는 밝고 깊은 눈과 붉은 입술을 가진 이 소년의 노래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 ...기도를 들은 마왕이, 소원을 들어 주기로..."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아무리 포프왕의 외동아들이자 에모리 공국의 제1황세자라지만, 저 겁없는 셔릴왕자는 지금 공국 최대의 터부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왕과의 계약. 모든 국민이 알고 있지만 굳이 외면하고 있는 그 슬픈 전설. 그 슬픈 현실... ...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앞으로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이제는 행복해질 거라고..." 셔릴의 입술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나즈막한 잠꼬대를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는 셔릴의 두 눈은 마왕을 상징하는 타오르는 붉은 수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노래를 계속함에 따라 더욱더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라도, 행복해질 거라고, 어둠 속에서라도, 행복해질 거라고,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 "그만!" 별안간 신전에 앉아있던 왕비기 소리쳤다. "그만해라, 셔릴! 그만해!" 왕비의 흰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그녀의 손은 허공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쫓으려는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셔릴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에모리의 왕비,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고통으로 가득찼지만. 마왕은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에모리의 사람들이 불행해졌는지를 깨달아야 했다. 자신의 부모님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동안 마음의 빛을 잃은 그들은 세상의 빛도 잃고, 아무런 위안도 없이..." 이따위 제의가 다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불행만을 안겨준 마왕에게, 더 큰 불행만은 내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비굴한 수작이 아닌가. 그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에모리 종족에게 저질렀는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더 큰 저주만은 말아주십사하는 자비의 구걸이라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 마왕, 당신을 증오한다. "...빛을 잃고, 맘을 잃고, 비탄을 얻어, 영원토록..." "그만 하거라, 셔릴! 충분하다!" 국왕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백해진 채, 혹은 눈물을 흘리며 셔릴의 노래를 듣던 군중들의 시선이 한 팔로 거의 실신상태에 이른 왕비를 부축하고 있는 포프 국왕에게로 향했다. 국왕 자신도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근엄함이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빛나는 셔릴 왕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제의 행사에서 (물론, 법적 나이에 겨우 다다른 셔릴 왕자가 참여한 제의는 이번이 처음이기는 하지만-) 마왕을 이렇듯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노래가 불려진 적은 없었다. 아니, 비난이라니, 그들은 마왕이 더 큰 불행을 내릴까 두려워 오직 자비를 기원하는 그러한 노래만을 불렀던 것이다. 혹시나 저 셔릴 왕자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지금 왕실에, 이 에모리에 내려진 저주보다 더 불행한 일이 왕자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에모리 종종에게 내려진 슬픈 저주. 그것은 슬픈 사랑에만 빠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찾아드는 <실명(失明)>이라는 재난. 마치 저 셔릴 왕자의 어머니인 리나 왕비가 첫사랑에 실패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포프 국왕과 결혼을 하고, 몇년 후 국왕에 대한 존경이 애정으로 변해갈 때쯤 실명을 해버린 것과 같이 말이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진보적 학자들의 주장대로 저주가 아닌지도 몰랐다. 마왕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며(-어쨌든, 그는 지난 수백년간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었으므로-), 실명은 에모리의 유전인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에모리 종족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들이 이러한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전 중앙의 거대한 수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붉은 빛, 마왕의 빛이었다. 무슨 일일까. 왜 마왕의 수정이 갑자기 빛을 발하는 것일까. 명망높은 신전의 사제들조차 생전 처음 겪는 이러한 사건에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붉은 불빛에 겁을 먹은 군중들은 저마다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셔릴 왕자도 놀란 눈치였다. 마왕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해오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응답이라니, 저 빨려들어갈 듯한 붉은 빛은 무얼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마왕의 분노? 순간 눈부신 붉은 빛이 신전을 메웠다. "꺄악!" 여자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겁을 먹은 사람들이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릴리아 광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사라진 순간... ... 셔릴 왕자의 모습은 신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III. 상처 무엇일까...망막을 간지럽히는 이 아스라한 빛은 무엇일까... 무엇일까...코끝을 자극하는 이 옅은 향기는 무엇일까... 무엇일까...저 멀리 날 바라보는 저 보라빛 두 눈은 무엇...? "음..." 셔릴왕자가 몸을 뒤틀며 작은 신음을 뱉어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내가 어디서 잠들었던가? 분명히 어제 마왕에의 제의에 참가하다가... 노래를 하고... 그래... 붉은 빛... 빛이 번쩍였지... 그후엔? 그 후엔? ... 낯선 천장이 보인다.. 셔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이상한 향기가 기억을 어지럽히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 내방이 아닌건 확실하군.."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검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침대보가 눈에 들어온다. 매끄러운 재질이 온몸을 휘감고 있어 기분이 좋긴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셔릴은 입은 다물지 못했다. 이건 방이 아니다! 방의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홀 안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런 상황이다. 검정 대리석 바닥과 검정 대리석 기둥, 샹들리에도, 창문도 없는데 어디서 이런 빛이 들어오는 것일까... 시트가 흘러내려 싸아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셔릴은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어 발을 딛었다. 아직도 어제 제의때 걸쳤던 붉은 키톤(Chiton, 그리스식 옷을 생각하면 됩니다. 한쪽 어깨에 걸치는) 을 입고 있다. 물론 꾸깃꾸깃하기는 하지만... 어서 이 성의 주인을 찾아 인사를 하고 궁으로 돌아가야겠다.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실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어제 그런 노래까지 불렀으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을까? 엉거주춤 침대에서 일어서던 셔릴은 순간 몸이 굳어버린 듯 멈추어섰다. 저쪽에 서 있는 저 사람. 왜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저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침대 왼편의 기둥에 기대어 한 남자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아..저...이곳의 영주님이신 모양이군요. 저는 에모리 공국의 셔릴 왕자입니다. 제가 실례를 많이 끼쳤군요...이 은혜는..아버님 포프 국왕께 말씀드려 꼭 갚도록 하지요. 귀공은 어느 가문의 누구신지.." 셔릴이 입을 열자 그 남자의 얼굴에 알듯말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별로 따스하지는 않은 그런 미소. 그가 입을 열자 방안의 모든 온기가 사라지는 듯 셔릴은 몸을 떨었다. "셔릴...셔릴이라...건방진 에모리의 인간이로군..." "무슨 말씀이신지..제가 하루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호오?" 다시 차가운 미소. "그래, 니 성깔은 어제 알아챘었지." 어제? 셔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 남자? "설마 어제 날 위해 부른 그 노랠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응?" 쿵! 셔릴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 놀랐다. 설마..설마...눈앞의 이 남자가... 설마가 아니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저 커다란 붉은 수정의 빛깔.. 이남자의 옷색깔과 똑같은데.. 인간 중에 이렇듯 보라빛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본적이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그가 바로 <마왕>인데! <마왕>인데! 셔릴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왕은 셔릴의 그러한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조소를 띄고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을 주는 크고 호리호리한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 머리결, 잔인해 보이는 보라빛 눈동자와 길게 자란 손톱... 그의 모습은 실로 전설 속의 마왕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제야 알아채셨나? 이런! 어제는 꼭 날 잡아먹을 듯 굴더니, 겁을 먹은 건가?" 셔릴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원수! 부모님을, 전 에모리 종족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장본인! "당신, 죽이고 말겠어! 내 손으로 꼭 죽이고 말겠어!" 셔릴의 손이 어느새 허리춤에 차인 호신용 단검으로 향했다. 체격이 작아 근력은 남들보다 약했지만 이리안느 궁성 내에서 셔릴의 단검 실력은 꽤나 알아주는 것이었다. 특히 그 스피드와 정확성에 있어서는 셔릴을 따를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럴 때 단검이라는 무기는 얼마나 유용한가. 셔릴이 막 단검을 빼어들고 마왕에게 휘두른 찰나, ....마왕의 붉은 소매가 얼굴을 스쳤다고 생각했다. "쨍그랑" 셔릴의 은단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창백해진 셔릴의 얼굴, 붉게 물든 그의 뺨에는 길게 두 줄로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왕이 그의 빰을 침과 동시에 손톱으로 만들어 놓은 상처였다. 셔릴은 낭패감보다도 자신을 향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마왕이 눈앞에 서 있는데 그에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제는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마왕에게 자비를 기대하느니 죽어버리고 말겠다. "인간이란 언제나 어리석군" 순간 마왕의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멈칫, 머릿속이 하얘진다. "뭐, 뭐, 뭐하는 짓이야!" "할짝" 이, 이게, 이게 무슨 짓인가? 마왕의 자신의 뺨에서 흘러내린 피를 핧고 있었다. 그의 붉은 혀가 자신의 볼에 살짝 닿고, 따끔한 상처를 훑고 지나간다. 마왕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드리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느낌. .. 셔릴이 얼굴을 돌리려는 순간 마왕의 손이 그의 턱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마왕의 손톱이 얼굴을 파고들었고 마왕의 혀는 여전히 그의 상처를 마치 맛있는 것인양 핥고 있다. 까칠한 혀의 느낌은 그후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마왕이 그의 볼을 마치 사탕이라도 되는 양 충분히 핥고 나서 그의 얼굴을 자유롭게 놓아주었을 때 셔릴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찼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주시지! 더러운 마족들의 수작 집어치우고 말이야!" 마왕의 얼굴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다. "아니, 오랜만에 얻은 귀중한 장난감을 그럴 순 없지 않은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도 많은데 말이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만큼 괴로운 그런 일들...예를 들면..." 마왕이 셔릴의 얼굴을 슬쩍 살핀다. "...그렇지, 눈이 멀어버린다든가" 미소까지 띄우고 툭 내뱉은 이 말은 셔릴을 다시 한번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잔인한 악마!"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기분. 그동안 지겹게 보아왔던 에모리의 수많은 탄식과 괴로움이 자신에게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셔릴은 다시 한번 하릴없는 시도를 한다. 이번에 단도도 아닌 손바닥으로. "짜악!" 미처 대비를 못했음일까, 아니 셔릴이 그런 무모한 대항을 시도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마왕의 얼굴에 셔릴의 손자욱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셔릴은 눈물로 범벅이된 얼굴로 마왕을 쏘아보았다. "당신이 뭔데..너 따위가 뭔데..우릴 이렇게 불행하게 만든거지? 왜? ...더러운 기만자! 그래, 마왕에게 약속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거지. . . 하지만...계약.. 왜.. 깨뜨린거지..? 사람들이 원한건 그저...그래..조그만..건.데..소원을 들어..주.기..로.. 젠장! 당신이 뭔데...! 비겁하고, 잔인한 자식..그래, 기분이 어떻던가? 장님이 되어 헤메는 내 어머니를 보니..,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에모리의 사람들이 죽어자빠지는지 알기나 하겠어?... 목을 멘다구, 약을 먹고..칼로 자신을 찌르지...왜? 사랑할 수가 없어서! 알기나 해? 왜 그랬어? 설명해! 설명하란...악!" 셔릴이 폭포수처럼 쏟아내던 말들은 채 끝마쳐지지 못했다. 마왕이 불의의 기습에서 벗어나 셔릴의 머리채를 잡은 것이었다. "아!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그는 셔릴의 버둥거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셔릴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셔릴의 얼굴이 젖혀지도록 만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의 표정. 한쪽 뺨에 셔릴의 손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가 빠져버릴 것 같은 아픔에 목이 꺾여라 뒤로 젖힐 수 밖에 없는 셔릴의 얼굴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왕의 얼굴이 다가왔다. 무.표.정. 서로의 눈동자가 얽히고 마왕의 냉기가 더 가까웠다고 느끼는 순간, 마왕이 입을 열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잖나, 안그래?" "무..무슨..?" "그리고 그 대가는 챙겨야겠지..?" 셔릴이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하는 충격, 아니 아픔이 이어졌다. 마왕이 셔릴의 뺨을 내리친 것이었다. "철썩, 철썩.." 숨쉴 틈을 주지 않고 연달아 날아오는 마왕의 손바닥을 셔릴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내야만 했다. 이젠 양볼이 얼얼하다 못해 아무런 감각이 없어지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목구멍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양볼에 따끔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 또 마왕의 손톱에 긁혀 피가 나는 모양이다. 마왕이 조금도 인정을 두지 않고 셔릴을 내려치고 있었기 때문에 셔릴의 가느다란 몸은 한번 맞을 때마다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얼굴도 이쪽저쪽으로 번갈아 꺾일 듯 휘돌아 가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나 맞았을까, 셔릴의 다리가 휘청하고 꺾였다. 얼굴이 부어 눈도 뜰 수가 없었다.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끌고가라" 그래, 이제 죽는 구나.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로군.. 누군가의 거친 손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도착한 곳은 습하고 어두운 감옥이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알지못할 컴컴한 복도의 끝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셔릴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서야 얼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입 안도 터지지 않은데가 없는 것 같다. 방안을 둘러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끈적끈적한 것들이 잔뜩 붙어있는 벽에는 창문하나 뚫려있지 않았고, 서 있기만 해도 냉기가 전해져 올라오는 바닥에는 담요도 없이 지푸라기만 쌓여 있었다. 저것이 침대인가 보다. 지푸라기 더미 위에 털썩 주저 앉은 셔릴. 일국의 왕자로 자라온 셔릴이 이러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일이다. 아까부터 머리가 웅웅거리는 것이 열이 있는 듯 했고, 게다가 제의용의 얇은 키톤 밖에 입지 않는 터라 한기 때문에 이빨이 딱딱 부딪힐 지경이다. 셔릴은 몸을 스르르 옆으로 뉘었다. 참으려 했지만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와 입김은 어느 때보다도 짙었다. IV. 다,다이 혹은 다이 "으..음..." 다음날은 더 좋지 않았다. 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통증과, 차고 딱딱한 곳에서 웅크리고 잠을 잔 결과 뼈마디들이 저마다 따로 노는 듯 삐그덕거리고 고열로 온종일 멍한 상태를 셔릴은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셔릴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은 이 지하(로 추정되는) 감옥에 사람이 없다는 것. 죄수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면 탈옥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복도저편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외엔 파리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간수 비슷한 것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때는 하루에 단 한번,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초록색의 느끼한 죽을 가져다 줄 때 뿐이었다. 혼자 하는 발광에 지친 셔릴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때였다. "야이, 미친 자식아 날 놔줘! 풀어 달란 말이야!" 혹은 "그냥, 죽여! 이 더러운 거짓말장이, 사악한 괴물아!" 등등이 셔릴의 주요 레파토리였는데, 그나마 이 말에 간수가 들은 척도 않고, 자신도 힘이 없어지자 셔릴의 외침도 사흘만에 끝나고야 말았다. 대신 고통스런 기침과 발열이 더 잦아졌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건지 모르겠다. 이젠 죽도 넘어가질 않고 머리를 들 수 조차 없는 셔릴은 갑자기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간수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다. 거칠하고 더러운 담요도 덮여있는 것이 그가 자신을 위해 덮어준 듯하다. 셔릴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 그가 급하게 셔릴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차가운 손이다... 마족들의 특성인가? 셔릴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얼굴이 붉어지며 눈을 피한다. "저..자..저...말을 하시면...안돼요.... .. 루퍼트 님께 들키는 날이면.." 순간 그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셔릴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인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얼굴이다. 그저 에모리의 시골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더벅머리 청년인데 다만 눈색깔이 파랗다는 것... 그리고, 체온이 차다는 것. 그것뿐이다. 다시 셔릴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더욱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아...저...루퍼트님이 이곳에 잘 ..내,내려 오시진 않지만...워,원래 죄수를 도,돌봐 주는 건..금ㅈ.." "파래.." "예?"" "눈이 파랗네.." "아..아.. 저,저.." 이제 그의 얼굴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홍당무같이 변했다. "저..저...제,제가 비천해서..., 그, 그래요.. 보,보오..으기 시..시..으..른..푸른 눈이지요? 루,루,루,,루퍼트님은...순수..마족이시라...ㄴ,누,눈 이 아,아르...다운..보..보..보라,라색이지..요... 그,..그런..눈은...우리 마..마족들 사이에서도 흐.흔치 않거든요..." 어찌나 더듬거리는지 불쌍할 지경이었지만 대충 요지를 보아하니 순수 혈통의 마족일수록, 그리고 귀한 핏줄일수록 눈동자가 보라색을 띈다는 말인것 같다. "아,아니야..내 말은.. 파란 눈이 예쁘다고." 느닷없는 간수의 자기비하에 놀란 셔릴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근데 이름이 뭐지?" "다,다이예요...다,..다이요" 하도 더듬어서 이름이 다인지, 다다인지 모르겠다. "여긴 어디?" "루,루퍼트님의 구,궁성 지하...미로지요.." 역시 지하였다. 게다가 미로라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저..다,.다이.." 갑자기 셔릴의 다,다이(?)의 손을 덥썩 잡았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나쁜 짓인줄은 알지만 이번에는 워낙 사정이 급하다. "저... 나 좀 여기서 꺼내주면 안돼?, 어차피 여기 가둬지면 마왕은 신경도 안쓰고, 죽어도 모르는 거잖아, 응?" "아,안돼요!!!" 다,다이가 사색이 되어 셔릴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소리를 질러 놓고 스스로도 놀랐는지 주변을 살핀다.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역력했다. "루..루퍼트님이 아시면 주,주,죽어요..사,사실...얘기를 나누..누..는.. 것도...그,그..으.음..지되어 있고, 다,담요..도 아,안돼요..그,그.그리고.." 어쩌나 몸을 떠는지 오히려 셔릴이 담요를 벗어 주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냥,,그래..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 다,다이. 마왕이 그렇게 무서워?" "예..그,그분이 하,한번 화,화 내,내시면... 어..어..어..얼마나.." "그래,그래, 알았어." 이 빌어먹을 마왕 녀석, 얼마나 성질이 더러우면 이렇게 겁을 낼까. 셔릴은 갑자기 다,다이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신을 처지를 생각해라 셔릴!) "아, 이..이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다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종이에 꾸깃꾸깃 싸진 것을 셔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종이를 펼치는데 "으..으악!" 셔릴의 비명이 온 감옥에 메아리쳤다. 다 말라 비틀어진 시커먼 사람손이 종이에 싸여 있었던 것. 다,다이는 다,다이대로 놀라 엉겁결에 셔릴의 입을 틀어막았다. 축축한 손바닥이 숨도 못쉬게 셔릴을 짓눌러왔다. "야,,야,약이야...너..아..아프잖아요.."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약? 사람손이? 마족에겐 사람손이 약인가? "으..." 구역질이 날것 같다. 셔릴이 신음을 흘리자 다,다이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내,,내,내가 구,구한 건데.." 이 부분에서는 어줍잖은 자부심마저 얼굴에 떠돈다. "워,원래 루,루퍼트님이 이.이런...포,포로를 잡진 아,않으시,신데...이,이번엔 왜,...루,루,루퍼트님이 아시면...아,아시면.." 다시 공포의 빛, 순간 다,다이의 뒤통수에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안돼지, 안그런가?" 셔릴과 다,다이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다,다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막느라 한 손으로 받치고 있던 셔릴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쿵, 돌바닥에 머릴을 찧은 셔릴이지만 아픔따위는 느낄 경황이 없었다. "루,루..루퍼트님" 사색이 된 다,다이가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다이, 내가 죄수를 돌봐주라고 했던가?" 냉혹한 목소리가 힐난하듯 묻자, 다이(이름이 다이였군..)는 더욱 어쩔 줄 몰랐다. "너...너..,너무 아,아파서...그,그래서..." "그래서?" 마왕의 목소리는 서릿장 같았다. 순간 "찰싹!" 또 나왔다. 저녀석의 특기인 빰 때리기. 어찌나 세게 때렸든지 몸집이 큰 편인 다이가 단숨에 벽에 부딪혀 비틀거렸다. 다시 한 걸음 다이에게 다가간 마왕. 다이는 머리를 감싸쥐고 아무런 반항도 못한채 다음 매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왕의 손이 또 한번 올라갔다. "그만해!" 순간 셔릴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아까까지는 고개도 겨우 일으키던 셔릴이 마왕과 다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론 둘 다 마족이고, 사람손 같은 걸 잘라와서 기겁을 하긴 했지만, 저 마왕이란 녀석에게 다이가 맞는 것을 두고 볼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내...내가 그랬어. 다이에게 내가 부탁했어. 걔가 잘못한게 아니야.." 마왕의 냉혹한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자 셔릴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천장이 빙빙 도는 것 같다. "그래?" 마왕의 얼굴에 다시 조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닐텐데?" 그건 그렇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저 순박한 다이가 상처입는 것은 싫다. "내 잘못이라니깐! 그러니까 다이를 때리지 말아! 대신..." "대신?" 야비한 미소. "대신..." 말해놓고 보니 할 말이 없다. 니브市에 쌓여있는 금을 준다고 할까? "대신...대신..." "이런건?" 마왕이 다시 성큼 다가왔다. 흠칫 놀란 셔릴이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읍" 셔릴의 동공이 커진다. 이..이 녀석..뭘 하는 거야? 마왕의 차가운 입술이 셔릴의 입술위에 겹쳐졌다. 얼굴을 빼고 싶지만 예의 그 손 힘이 어찌나 센지 까딱도 할 수가 없고 마왕의 손톱이 또 얼굴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따끔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잡아먹을 듯 거친 키스. 이빨과 이빨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영혼을 빨아들일 것처럼 거칠게 빨아온다. 그제나 저제나 숨을 쉴수가 없어 미칠 지경인데 이 마왕 녀석은 지치지도 않은지 그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빨아대고 있었다. 마왕의 혀가 셔릴의 희고 가지런한 이를 건드리는가 하더니 억센 손힘으로 셔릴의 턱을 벌림과 동시에 마왕의 혀가 침범해 들어왔다. 현기증이 난다. 셔릴의 혀를 휘감으며 마왕의 혀는 한마리의 살아있는 뱀처럼 셔릴의 입안을 점령해 나갔다. 그렇게 빨아대지 말앗! 숨쉬고 싶어! 등등의 말이 셔릴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입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침이 과잉분비된다. 그리고 셔릴은 천장이 다시 한번 도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쯧쯧, 이런 거라도 잘하면 봐줄까 했더니..." 셔릴을 한팔에 끌어 안은 마왕의 말이었다. "다이!"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한재 멍하니 마왕을 바라보고 있던 다이의 어깨가 다시 움찔했다. "털썩" "데려가서 씻겨라" 마치 가벼운 짐짝을 취급하듯 셔릴을 다이에게 던진 마왕의 말이었다. "다이!" 엉거주춤 셔릴을 들쳐메고 감방을 나가려던 다이에게 다시 마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뒤돌아 보니 마왕이 리고테토의 열매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가 딴 건가?" "...예.." 다이는 다음에 떨어질 마왕의 불호령을 기다렸다. 돌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죄수를 돌봐준데다 근무시간에 죄수를 위해 약까지 구하러 간 것은 아까의 따귀 한대 정도로 용서될 일이 아니었다. "...갈아라" 냉혹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옛?" 진땀이 다이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전에 마왕을 시해하려다 온몸이 도륙된 죄수가 있었다. 마계에서도 꽤나 권세가 있는 마족이었던 그는 죽은 후에도 처참하게 뼈와 살이 짓이겨지고 갈려 온갖 마물들의 먹이로 강에 뿌려졌었다. "...리고테토의 열매, 깨끗이 갈아 가루로 만들어 가져와라. 멍청한 인간 녀석이 사람손으로 착각한 모양이군... 인간은 씻긴 후에 침실로 데려가라. 침대 하나를 더 마련하고 니가 보살펴라. 처벌은 차후에 보기로 하지." "아..예, 루퍼트님" 다이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아왔다. 그는 마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허둥지둥 지하 감옥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V. 처벌 1 "으..으..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기분을 느끼며 셔릴은 눈을 떴다. 마왕의 성으로 온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 들어 부쩍 기절했다 깨어나는 일이 잦아진 것 같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정신과 육체가 따로노는 듯 셔릴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 깨,깨어 났어요?"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돌려보았더니 다이가 수정으로 된 컵을 들고 반색을 하며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거의 벌벌 떨며- 셔릴의 윗몸을 일으킨 다이에게 셔릴이 물었다. "여긴..?" "루퍼트님의 방이지요." 그러고 보니 처음 이 마왕의 세계로 끌려들어 왔을 때도 이방에서 잠을 깨었었다. 예전과 다를 것이 없는 방이다. 황량할 정도로 크고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다만 자신이 지금 누워있는 침대가 마왕의 침대에서 약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놓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마왕의 침대는 시트가 흐트려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루,루퍼트님은 와,왕성에 나,나,나가셨어요." 셔릴의 시선을 따라가던 다이가 재빨리 말했다. 흥, 그 녀석이 어디에 있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어떻게든 녀석이 없는 사이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셔릴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그제서야 느끼며 생각했다. 다이는 어느새 가지고 온 컵에 무엇인가 갈색 액체를 부어 셔릴에게 내밀었다. "약.." 이번엔 사람손이 아니군... ... --; 하지만, 또 다이의 마음이 고맙기는 하지만, 더이상 이곳에서는 일분도 지체하기가 싫었다. 사실 더 있다가는 그 마왕 녀석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셔릴의 생각이었다. "나...갈래.." 셔릴은 이를 악물고 침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안돼요!" 순간 다이의 억센 손이 셔릴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아,아프잖아요... 루,루퍼트님이 도,돌봐드려리고..." 돌봐줘? "감시하라고"겠지... 젠장,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셔릴이 다시 침대로 파고 들었다. 어차피 다이가 있는 한 도망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셔릴은 궁성에서 배운 어설픈 병법지식을 떠올리며 이불 속으로 고개를 묻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보지 않는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저...약..." 다이의 음성이 귓가에 들린다. 보나마나 울상을 짓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디 이곳에 온 이후로 셔릴의 마음대로 된 것이 있었던가. 갑자기 이불의 확 젖혀졌다. 눈을 떠보니 또 저 표정없는 마왕의 얼굴이 보인다. 그 뒤에 다이가 벌벌 떨며 컵을 들고 서 있다. "버릇없는 녀석이로군, 그런 녀석은 매를 맞아야지....다이, 가봐라." 또 때릴 모양이다. 그래도 저 녀석이 주는 약만은 절대 먹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셔릴이었다. 다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셔릴에게 한번 던지고 방을 나갔다. 방안에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셔릴와 마왕만이 남았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셔릴이었다. 셔릴은 마왕을 무시하고 침대로 고개를 묻으려고 했다. 그러나 마왕은 셔릴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셔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셔릴의 입에 억지로 컵을 들이댄 것이었다. 셔릴은 이를 악물었다. 니 녀석이 주는 약 따위 받아먹을까 보냐. "입 열어" 마왕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이 입술을 타고 턱으로 줄줄 흘러내린다. 셔릴은 마왕을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마왕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한 것은 셔릴의 착각이었을까. 뭐하는 거야 이녀석...마왕이 갑자기 컵에 있는 약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셔릴의 동공확대... 또 키스다...뭐,뭐야...입으로 약을 먹이겠다고? 마왕의 의도를 눈치챈 셔릴은 더욱 입을 앙다물었다. 죽어도 입을 여나 봐라... 그런데...으,으앗, 마왕이 한손으로 셔릴의 코를 잡는 것이 아닌가. 숨을 쉬고 싶으면 입을 열어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셔릴의 얼굴이 숨을 참느라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헉" 하고 셔릴이 숨을 토해내는 순간 왈칵 약이 마왕의 입에서 셔릴의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콜록콜록.." 놀란 셔릴이 약물을 뱉아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일. 약은 이미 반 이상이 셔릴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후였다. 숨을 참느라 빨개진 얼굴, 열 때문에 충혈된 눈으로 셔릴은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마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다시 마왕이 컵을 입에 들이댄다. 이번에도 거부하면 또 입으로 먹이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미칠 지경이다. 조심조심 셔릴이 입술을 여는 순간 "읍" 셔릴의 입안으로 들어온 것은 약이 아니라 마왕의 혀였다. 지난번처럼 셔릴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입을 못다물게 하고 능수능란하게 셔릴의 혀를 가지고 놀고 있다. 마왕의 혀가 셔릴의 입천장을 훑고 지나가는가 하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또 빨아당겼다. 셔릴이 어떻게든 머리를 빼보려고 했지만 마왕의 손힘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한손으로 마왕이 더듬더듬 셔릴의 옷깃을 젖히고 옷을 어깨까지 끌어 내렸다. 여전히 입술은 셔릴의 입술을 탐하는 채로 한손이 셔릴의 젖꼭지에 와 닿았다. 유난히도 찬 마왕의 손에 셔릴은 오싹 소름이 끼치고 다리가 떨리기 사작했다. 뿌리치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마왕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젖꼭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손가락 사이에 셔릴의 젖꼭지를 끼고 슬슬 원을 그리는가 하더니 손가락 하나로 이리저리 튀기기도 하고 그러다 꼬집기를 수차례, 셔릴은 온몸을 파고드는 찌르르한 아픔에 다리만 버둥댈 뿐이었다. 마왕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것 놔, 이 미친 자식! 죽여버릴 테다!" 마왕의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호를 그리면 휘어졌다. "호오~ 인간이 마왕을 죽인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그런데 하나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군.. 너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걸.." 마왕의 이빨이 셔릴의 어깨를 파고 들었다. "아악!" 셔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피...마왕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셔릴의 어깨에서 선홍색의 피가 송글송글 맺혀 올라오는가 하더니 어느새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시트를 적시기 시작했다. 다시금 팔 다리를 버둥대며 저항을 시도하는 셔릴을 마왕은 한 손으로 가볍게 제지하며 셔릴의 다리를 덮고 있는 옷자락을 허리쪽으로 밀어 올렸다. 셔릴의 하얀 피부와 가늘고 긴 다리가 드러나자 마왕의 오른손이 다리를 다리의 곡선을 따라 셔릴의 몸을 훑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 떼, 이 자식! 죽여버릴 테다! 죽어버릴 꺼야!" 셔릴의 목소리가 큰 방안에 메아리쳤다. 지금, 평생동안 증오해 왔던 이 더러운 마왕이란 자식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마왕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들어올린다고 생각한 순간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셔릴의 손이 허공을 한번 휘젓는가 하더니 마왕을 밀어내기라도 할 듯 자신을 양쪽 겨드랑이 밑을 받치고 있는 마왕의 팔을 움켜잡았다. 애널에서 느껴지는 참기 힘든 이물감, 살이 찢어지는 끔직한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셔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신경이 뒷쪽으로 집중되고 온몸의 근육이 한꺼번에 뭉쳐져 몸속으로 예고도 없이 들어온 이물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마왕은 그런 셔릴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셔릴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욕망의 빛이 떠올랐다. VI. 처벌 2 .. 그리고 마왕이 천천히 몸을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윽~" 셔릴이 고통을 참느라 이가 갈릴 정도를 이를 앙다물었고, 무의식 중에 셔릴의 손은 마왕의 팔을 떠나 침대 시트를 거머쥐었다. 아무런 전희도 없이 셔릴의 애널을 찢고 들어온 마왕의 분신이 셔릴의 몸속에서 더욱 뜨겁고 커다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화가 난듯, 어쩌면 웃고 있는 듯 보이는 마왕의 얼굴이 셔릴의 눈앞에서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히고, 그 차가운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뜨거운 땀방울이 셔릴의 얼굴과 가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호리호리한 외관 속에 감춰져 있던 근육이 터질 듯 팽팽히 달아올라 있는 것이 흐트러진 마왕의 옷자락 사이로 셔릴의 눈에 들어왔다. 눈물..고통으로, 혹은 분노로 인한 눈물이었을까. 셔릴은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증오했? 철퍽철퍽 살과 살이 부딪히는 음蔥?소리, 자신의 살에 와 닿는 마왕의 느낌과 맹렬하게 앞뒤로 자신을 꿰뚫고 있는 마왕의 분신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질긴 놈의 정신은 셔릴을 그리 쉽게 떠나지 않았다. 멀어질 듯 멀어질 듯 가물거리면서도 셔릴은 자신이 깨어있음을 찢어진 살을 쓸고 지나가는 마왕의 분신에 의해 느끼고 또 느끼고 있었다. "으음...좋아...으..으..음" 또하나, 자신을 얼굴에 떨어지는 뜨거운 땀방울과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는 마왕의 신음소리. 횡댕그렁한 방안에서 무섭도록 메아리치는 그 신음소리가 셔릴의 정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듣기 싫었다. 저 신음소리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 것만 같았다. 벌써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만큼 지겹게도 셔릴의 몸안을 들락거리고 있는 마왕의 저 숨소리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저 소리, 듣.기.싫.어... "으..음" "널 죽이겠어.." 셔릴의 목구멍에서 쥐어짜듯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으..음" "너..윽.., 반드시..죽일꺼야.." "음...좋..아.." "죽여버리겠어! 너 죽일꺼야..으..윽..이 자식...죽여버릴꺼라고!" "헉..헉..음.." "...죽여줄테다, 죽일꺼야, 죽어! 죽어! 죽일꺼라고!!" "음..으..음.." "흑....갈기갈기 찢어서 죽어줄꺼야!.." 절규하듯 고통에 찬 비명과 또 억지로 눌러진 흐느낌이 간간이 섞인 셔릴의 목소리, 그리고 셔릴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마왕의 신음소리만이 큰 방을 메우고 있었다. 스르륵-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을 다시 걸쳐 올리며 루퍼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피와 범벅이 된 정액이 주욱하고 자신의 분신을 타고 내려 셔릴의 배위로 떨어졌다. 루퍼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셔릴이 정신을 잃고 널부러져 있는 침대를 내려다 보았다. 피... 셔릴의 흰 몸이 온통 피와 정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딱히 피가 싫다거나 상처를 준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지금까지 그런 적을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이빨 자국이 상처로 뒤덮인 셔릴의 작고 하얀 몸 위에 피까지 얼룩이 지니 그리 미학상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다이!" "예..예" 루퍼트의 나즈막한 소리가 울리자 다이가 급한 발걸음을 재촉하며 들어왔다. 주인이 저 아름다운 인간에게 벌을 주겠다고 한 후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방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어 정말로 셔릴을 죽여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어..어..억" 피투성이가 된 셔릴을 본 다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죽어도 짐작하지 못한 다이로서는 그저 셔릴의 마왕의 심기를 건드려 죽도록 얻어터진 것으로 밖에 상황을 짐작할 길이 없었다. 마왕이 옷을 갈아입으며 다시금 냉정한 소리로 말했다. "깨끗하게 씻기고, 시트를 갈아라. 깨어나거든 리고테토의 열매를 먹이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라." "아..예..." 마왕에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웬지 셔릴이 너무 가여워 눈물이 글썽해지는 다이였다. 마왕이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 하자, 다이가 용기를 짜냈다. "저...루,루,루퍼트님,...시.시,..식사는?" 마왕이 획하고 돌아서자 셔릴의 곁에서 벌벌 떨고 있는 다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한번도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하거나 대꾸를 하지 못했던 다이였다. 냉소가 또다시 마왕의 얼굴에 떠오른다. "이 인간이 좋으냐, 다이?" 다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변했다. "...내 명령을 어기고, 약을 구하러 갈만큼..?" 이번에는 다시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 잊고 있었다. 루퍼트님의 처벌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루퍼트는 그냥 그런 다이를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며 벌벌 떨고 있는 다이에게 루퍼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화가 잘될만한 음식을 먹여라, 옷도 갈아입히고." 쾅하고 닫힌 방문을 감동해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다이였다. VII. 욕망 평소와 같이 마족을 다스리기 위한 지시를 이것저것 내리던 마왕이 손을 한번 휘저으며 부하들을 물리쳤다. "제기랄" 저 건방진 인간녀석이 깨어나지 않은지가 벌써 3일째다. 저렇게 약해빠진 인간 놈이 자신에게 그렇게 대들었다고 생각하니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녀석을 강제로 취하는 동안 녀석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지하 감옥에서 일주일을 썩어서 몸이 축날대로 축난 녀석에게 그렇게 무리하게 박아댔으니... ... "으..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루퍼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녀석과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몸이 달아올라 버려 최근 한동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또한번 깨어나지 않는 셔릴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녀석을 죽도록 심하게 가지고 논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후회라...그런 것이 과연 마족에게 있을 수 있을까? 아니..저 다이를 보건대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루퍼트, 자신만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욕정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상대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짓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지고 싶으면 가진다. 그것 뿐이다. 더구나 저 인간녀석. 대담하게 나에게 대들기까지 했단 말이지.. 자신을 행해 죽여버리겠다고 악을 쓰는 그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즐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상대방의 몸을 주무르는 과정에서 상대가 흥분하고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이 알 바 아니다. 다만 상대의 쾌락을 위해 자신이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루퍼트의 지론이었다. 자신이 기절한 상대에게까지 그렇게 흥분해서 밀어붙인 것은 예전에는 분명히 없던 일이긴 하지만 하룻밤 쾌락의 상대에게 여러번 하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고, 그래서 자신의 침실로 제발로 찾아드는 마족들이 아직도 저렇게 많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제기랄" 녀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이 아랫도리가 뜨거워져 버리는 이 현상. 벌써 며칠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널부러져 있는 인간놈을 바라볼 때마다 욕망으로 온 몸이 달아오르는 통에 루퍼트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냥 혼절한 상태의 녀석을 안아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상태의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무 재미도 없다고 결론내린 루퍼트였기에 셔릴이 깨어날 때까지 아무나 옆에 있는 상대를 건드리며 욕망을 달래고 있던 차였다. 셔릴의 생각으로 흥분한 육체는 쉽사리 식지 않았다. "제기랄" 루퍼트의 발걸음은 어느새 자신의 셔릴의 침실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문앞에 다다르자 안타까운 표정의 다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이" "예..예.주인님?" "깨어났나?" "아.,아직.." "..." 제기랄,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니... "라밀다를 들여보내." "...예.." 라밀다라는 이름에 다이의 얼굴에 떠오른 가벼운 저항의 표정을 무시한 채 루퍼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몇분 지나지 않아 루퍼트의 침실로 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노크조차 없이 들어온 그녀의 무례함에 루퍼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그것도 잠시, 루퍼트는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겨내리기 시작했다. "아~~이~~, 루퍼트님, 오늘은 왜 이렇게 급하시대요?"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루퍼트의 귀에 감겼다. 터질듯한 가슴과 적당히 살이 오른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속옷을 입은 이 빨강머리의 여인. 루퍼트가 가장 자주 찾는 잠자리 상대였으며, 마족 중에서도 꽤 지체가 있는 귀족이기도 한 라밀다였다. 루퍼트가 그녀를 침대로 밀어 눕히자 그녀의 얼굴에 만족감과 자신감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루퍼트가 궁정내 누구와도 마음이 내킬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자신을 가장 즐겨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어떤 특별한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라밀다는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가정아래, 라밀다는 궁정내에서 내무총녀라는 자신의 위치를 뛰어넘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루퍼트 역시 그 사실을 어느정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루퍼트의 손이 거칠게 라밀다의 가슴을 거침없이 더듬었다. 이미 마왕의 손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라밀다의 육체가 순식간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응.." 여느때보다 급하고 거친 루퍼트의 손길이 그녀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어느새 걸친듯 만듯한 속옷까지 걷어내버린 마왕의 손길이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향하자 그녀도 질세라 마왕의 온몸을 손과 입술로 더듬기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루퍼트가 라밀다의 몸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라밀다의 신음이 더욱 끈적끈적하고 높은 교성으로 변했다. 평소보다 더 빨리 흥분하고 더 거칠게 자신에게 돌진하는 루퍼트에 보조를 맞추어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라밀다는 쾌락의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VIII. 시선 ...굉장히... ... ... 오랫동안 잠을 잔 것 같다. 꿈에서 자신의 아버지 포프 국왕과 어머니 리나 왕비가 어린 시절의 셔릴왕자와 함께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포프 국왕과 아름답고 정숙한 리나 왕비...어머니 리나 왕비는 현실과는 달리 꿈속에서는 눈이 보이는 듯 셔릴을 껴안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음악처럼 들려오는 어머니의 달콤한 목소리... ... 이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좋겠다고 꼬마 셔릴은 생각했다. ... ... 어디선가 커다란 붉은 새 한마리가 정원의 나무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기묘한 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새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 희미해져가기 시작했다. 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 부모님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저 새를 쫓아야 해. 시끄러...시끄러... 셔릴은 식은땀과 함?눈을 떴다. 캄캄한 방안이다. 눈에 익지 않은 어둠 속으로 낯선 장소의 냄새가 난다. "아..앙...응, 루퍼트, 루퍼트님.." "..으..음" "하..악, 아..음, 나..미쳐.." 기묘한 공기가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숨이 넘어 갈듯 신음을 지르는 여인의 목소리, 거친 남자의 숨소리, 질퍽질퍽하는 음탕한 살소리가 뒤섞여 셔릴의 잠을 순식간에 달아나게 했다. 무슨...? 셔릴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보라빛 눈동자. 셔릴의 동공이 커졌다. 여전히 교성을 내지르는 라밀다에게 피스톤질을 계속하면서 루퍼트의 눈은 셔릴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씨익... 루퍼트가 소리없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뭐, 뭐야... 셔릴의 온몸이 움찔하는 것을 루퍼트의 눈동자는 놓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루퍼트는 셔릴과 눈동자를 마주친 채 더욱 거칠게 라밀다의 몸을 탐했다. 셔릴은 얼른 눈을 감았다. 미친놈...더러운 놈...더러운 변태...저녀석 완전히 미친 변태아냐.. 눈을 감고 있어도 귓속을 파고드는 라밀다의 신음소리와 마왕의 숨소리는 집요하게 셔릴을 괴롭혔다. 또하나, 눈을 감고 있는데도 느껴지는 마왕의 시선, 눈을 뜨면 당장 눈이 마주칠 것이 분명한 따가운 마왕의 눈길에 셔릴은 미칠 것만 같았다. 마왕의 시선을 마치 "지금 내가 범하고 있는 것은 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신의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마왕의 몸아래 깔린듯한 굴욕감에 셔릴은 이을 악물었다. 라밀다의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어느 순간 한번의 긴 신음과 한숨을 끝으로 지겹게도 반복되던 여자의 소리가 그쳤다. 마왕의 숨소리도 차차 안정된 호흡을 찾아가는가 싶었다. 그래도 셔릴은 눈을 뜨지 않았다. 저 미친 변태 녀석이 무슨 마음으로 자신을 괴롭히는지는 몰라도 눈을 마주쳐서는 안될 것 같았다. 자는 척...자는 척...셔릴은 눈꺼풀 하나도 까딱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비음이 잔뜩 섞인 여자의 콧소리와 그녀를 싸늘하게 뿌리치는 마왕의 목소리, 총총거리는 발소리와 문닫는 소리가 들리고... ... 긴... ... ... ... ... ... ... ... ... 침묵이 계속되었다. 살짝 눈을 떠볼까... 아니...아직 마왕이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깨어있는 걸 들키면 안돼... 그래도 너무 조용한데... 아까 그 여자랑 같이 나간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굉장히 조용한데... ... ... 나..갔...겠.....지? 어! 또!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이번에는 코가 마주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마왕의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다. "으..으으..으앗!" 셔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큭큭... 잘잤나?" 마왕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얼굴위로 쏟아지는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뜨기 싫었다.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눈을 뜨면 마왕의 그 보라빛 눈동자와 마주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셔릴은 자신이 없었다. 당혹한 표정을 짓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것이 저 마왕이 의도한 바일테니... 생각 같아서는 마왕놈을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마왕의 절대적인 힘 앞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셔릴은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기회를 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결국 셔릴은 마왕을 무시하고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쪽을 택했다. 눈을 뜨고 마왕의 얼굴을 보게되면 분노나 당혹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쯧... 좋은 구경을 했으면 한마디쯤 감사인사나 박수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다시 조롱하듯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셔릴이 무슨 생각으로 눈을 뜨지 않고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는 듯 도발하는 말투. 결국 셔릴이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속삭이는 마왕의 눈동자가 부딪혀 왔다. 냉정하자...냉정하자... 이대로 저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돼... " 당신네 마족들은 모두 당신처럼 변태인건가? 아니면 당신만 특별히 그런건가?" 눈을 뜨고도 몸을 일으키지 않은채로 셔릴도 목소리에 한껏 빈정거림을 담았다. "변태? 변태라... 큭...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인간" 마왕의 얼굴에 즐거운 호기심이 떠오른다. 그러더니 갑자기 셔릴의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옷을 추스려 입지 않아 드러난 그의 땀맺힌 맨살이 어느때보다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뭐! 뭐야?" 움찔 셔릴의 몸이 떨렸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마왕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셔릴은 마왕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일으켜 침대 모서리 쪽으로 도망갔다. "큭~" 또 다시 마왕의 비웃음. 아니 재미있어 하는 표정. "걱정마라, 인간..아무런 감흥도 없는 뻣뻣한 니 몸을 다시 가질 생각은 없어... ... 큭... 뭐...당분간은 말이지..." IX.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다... 루퍼트는 자신이 지금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 한번, 녀석을 안고 난 후부터-그것도 그렇게 격렬하게 반항하던- 녀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주제에, 그런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도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녀석을 보며 몇번이나 다시 안고 싶던 충동을 억제했던 주제에, 그래서 결국 녀석 대신 라밀다를 안아버린 주제에... 자신이 왜 지금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루퍼트는 몰랐다. 하지만 이런 루퍼트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셔릴은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왕의 그 뻔뻔스러움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윽~!" 억지로 몸을 일으켰더니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셔릴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뭐래도 이 마왕 녀석에게만은 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어... " 너, 너...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줄테다. . . 죽여버리겠어. . ." 앙摹?입술 사이로 셔릴의 살기어린 말이 새어나왔다. 마왕에게 처참하게 능욕당한 그 날의 기억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셔릴을 지배해갔다. 루퍼트의 얼굴에서 차가운 웃음이 살짝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루퍼트가 셔릴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보라색 눈동자가 셔릴을 한동안 응시했다. 다시 루퍼트의 입술 한쪽이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큭... 큭... 좋아, 그것도 좋군. .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다..라... 큭. .. " 셔릴의 양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침대의 시트를 그려잡았다. 비웃는 것이다. 저 마왕 녀석. . .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무시하고 있다... "너... 기다려...내가 죽일 때까지. . .꼭 죽일 테니까..." 마왕의 시린 눈동자가 다시 셔릴의 눈동자에 부딪혀 온다. 셔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정말 무섭도록 위압감을 주는 존재다.. 죽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과연 내가 저 마왕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을까...? "기다리지. . . 니가 날 죽일 날을 . . 후후훗. . ." 갑자기 긴장이 탁 하고 풀려버렸다. 셔릴은 침대보를 그러쥐었던 자신의 주먹이 스르르 풀림을 느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 마왕의 웃음이 긴장을 끈을 놓아버리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말을 비웃고,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저 웃음이 조금은 슬퍼 보인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 . 셔릴은 말도 안된다는 듯 자신의 그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마왕은 여전히 그 "비웃음"을 띤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젠장.. 저 보라색 눈동자... 온몸에 벌레가 스물스물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 "쳐다보?말앗!, 내앞에서 꺼져버리라구!" 셔릴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긴 "내" 침실이란 걸 말이지. . " 셔릴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럼, 내가 나가면 되겠군!" 시트를 확하고 젖힌 셔릴은 침대 밖으로 내려섰다. 비틀~. 잊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날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는 저 마왕 녀석이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 . 며칠간을 누워있다 갑자기 일어선 셔릴이었다. 어지러움과 통증에 바로 설 수가 없었다. 젠장.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문쪽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이 성을 나가면. . . 나가면. . . .. . "나가면 갈 데라도 있는 건가? 큭. . ." 뒤통수를 찌르는 마왕의 목소리. "... ..." 또 잊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 ... 그저 이 지긋지긋한 방을 나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 붉은 수정에서 빛이 나고... ... 깨어보니 .. ... ... 이곳에 있었다. "어떻게 날 이곳으로 끌고온 거지?" 셔릴이 마왕을 뒤돌아 보았다. 마왕은 아예 셔릴의 침대 위에 편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글쎄~"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한 조소가 얼굴에 걸려있다. "직접 겪어 봤으니 알 것 아닌가... 붉은 수정이 널 끌여들였지." "... ..." 셔릴의 얼굴에 불끈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말장난이라도 하듯 자신을 놀리고 있는 저 마왕을. . . 죽. 여. 버. 릴. 테. 다. "... ... ... ㅇ...ㅗ...ㅐ...? 셔릴의 입술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뭐라고 말을 하는 듯 하다. " ... ... ... ... .. .왜... .... .... ?" 이번엔 똑똑히 들렸다. "왜" ... 마왕의 셔릴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셔릴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추스리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머리도 단정하게 하나로 모아 묶었다. 셔릴은 마왕의 등을 뚫어질 늣 노려보았다. "... ... ... ... 왜... 그랬는지 말해! 말하란 말이야! 왜 나를 끌고 왔지?... ... ... 왜... 약속을 어긴 거지?... 왜... 에모리 국민을 괴롭히는 거야? ... 왜... 왜... 그들을 눈멀게 하는 거지?.... 왜 ? 눈을. . . 가져갔으면... 사랑..이라도 느끼게 해줘야지........ .... 흑.. 젠장! 말을 해! 마왕, 당신이 약속하지 않았었나? 알고 있었던 거지!... 야비한 네 녀석...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 ... ... 눈을 잃으면서 피폐해질 마음... 알고 있었던 거지! .... 사랑을 느끼게 되면 눈을 잃게 해버린 이유를 말해보란 말이야!..." 순간 마왕의 셔릴을 향해 돌아섰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표정. 비웃음조차도 사라지고 없는 얼굴이었다. 셔릴은 저절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 말해봐, 왜 그랬는지... , 왜 그랬어! " 셔릴의 목소리가 마왕의 위압감을 억지로 없애기라도 할 것처럼 저절로 높아졌다. "니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 졌는지 알아?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 사랑을 느끼게 되면 ... ... 눈을 잃는 고통... 너..따위... 그래, 너 따위가 알아.... 흑.....젠장...너따위가 알 리 없지.... ...알았다면 그런 잔인한...일...흑... ... 아니, 네놈은 알면서도 했을지도 모르지... ... ..흑......" 간간이 셔릴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마왕이 뚜벅뚜벅 셔릴에게로 다가왔다. 움찔...셔릴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마왕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셔릴은 온힘을 다해 마왕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느덧 셔릴과 마왕의 거리가 1미터도 되지 않았을 때, 셔릴의 긴장감이 최고에 달했을 때, 루퍼트가 셔릴의 어깨를 스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 ... 어리석은 인간... ... 자업자득 아닌가..." 그러더니 문을 닫고는 가버린다... 셔릴은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따귀 몇대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가만... 전에도 자초니 뭐니 하는 말을 저 입에서 들었었던 것 같은데... ... 그땐 단순히 내가 자신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봐! 무슨 말이야! 무슨 소리냐구!!!" 셔릴은 루퍼트가 걸어나간 문을 쏘아보며 소리 질렀다. 저 마왕 놈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가.. 마왕을 따라잡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댔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마왕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대로 문고리를 잡고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셔릴을 보며 루퍼트의 얼굴이 다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할 말 있었나?" ".. ... 무슨... 뜻이야... ...말해!" "풋.... 하하하하핫..... ..." 크게는 웃고 있는데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 웃음. "...?..?...?" "역시 멍청하군... ... ... ...." "뭐야?" 순간 마왕이 몸을 구부려 셔릴의 귓가에 입을 갔다 대었다. 다시 움찔하고 굳는 셔릴을 조롱하듯 마왕의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큭... ... 거짓말이었다..." 또 마왕의 페이스에 놀아났다... 셔릴은 이모저모 생각할 틈이 없었다. 분노가 셔릴의 이성을 마비시켰기에... 몸을 돌리며 루퍼트에게 손을 날렸다. .... ... 결국 잡히고 말았지만... ... 셔릴의 팔을 붙잡은 루퍼트의 표정은 그리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여느 때처럼 손이 먼저 나갔을 뿐이다. "찰싹" 셔릴의 빰에 선명한 손자국이 새겨졌다. "이걸 교훈으로 삼도록 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 것." 그가 다시 셔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난 태어날 때무터 명령을 받기 싫어하는 성미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셔릴은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 나간 것만 같았다. 셔릴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X. 탈출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온 것이... 어쩌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것 같고, 어쩌면 일년이나 지난 듯한 기분. 감옥에서 이 방으로 끌려온 후 한번도 이 방을 나가보질 못했다. 그저 다이가 식사를 가져오면 먹고, 졸리거나 몸이 아프면 잠이 들었다. 가끔씩 마왕에게 대들다 뺨을 맞았고, 탈출을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 단단히 잠긴 문을 뚫고 나갈 재간이 셔릴에게는 없었다. 창문도 없는. . .그렇지만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 불가사의한 구조의 방. 그곳에 셔릴이 갇혀 있었다. . . 한가지 셔릴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고통스럽던 날 이후로 마왕녀석이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 .뺨을 때리는 것 등도 "손을 대는 행위"에 포함시킨다면 이야기는 달라긴 하지만. 정말로 뻣뻣하기만 한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건지, 그렇다면 왜 자신을 감옥도 아닌 침실에 계속 감금하고 있는 것인지 셔릴로써는 다행스러우면서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 밤마다 들려오는 저 신음소리... ... 그리고 각기 다른 여자들 혹은 남자들이 뱉어대는 그 신음과 함께 자신의 몸위로 쏟아지는 마왕의 저 시선... ... "여기서 나가야해... 나가야해..." 다이가 가져온 식사를 반쯤 남긴 채 셔릴은 침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마왕의 성에서 어떻게 에모리 공국으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추측도 하지 못했지만 일단 이 방만이라도 빠져나간 후 길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몸도 회복이 되었고, 마왕이 어느 시간에 나가서 언제 들어오는지 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어있는 터였다. 문제는 저 문이었다... 복도로 통할 것처럼 보이는 저 문은 다이와 마왕이 드나들 때를 제외하고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그는 모양이었다. 에모리 궁전에서 가끔 써먹고 하던 가느다란 핀으로 쑤시기도 여기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계의 문은 인간세계의 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다. "시,시,식사 ㅎ,하세요, 셔릴님."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는 셔릴의 귀에 여느 때처럼 다이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 ".. .셔..셔릴님.." 다이는 조바심이 났다. 아름다운 셔릴님에게 루퍼트님이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평소에도 생각해오던 다이였다. 가끔씩 보이는 손자국, 셔릴의 눈물자욱-셔릴은 극구 감추려고 했지만-이, 또 언제나 반쯤 남겨진 채로 돌아오는 식사가, 요즘들어 더욱 말라가고 말이 없어지는 셔릴의 모습이... 다이의 조바심을 부채질했다. 어디 병이라도 난 건 아닐까... ...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루퍼트님은 왜 그리도 차갑게 대하시는 걸까... 루퍼트의 명이라면 웃으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다이였지만 이번 일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식사.." "... ... ... " 여전히 셔릴은 말이 없다. 다이는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지난번처럼 기절한 것은 아닐까. 다이가 시트를 들추려는 순간이었다. "...으..음.." 시트가 스르륵 움직이며 셔릴의 얼굴이 드러났다. 열이 있는 듯 빨개진 얼굴. 다이의 얼굴을 보자 셔릴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 다이... 식사..로군... 언제나... 고마워.." "어,어,어디...아프시,신 거,건가요?" "아니, 아니야. 걱정마...." 다이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셔릴이 머리를 도리질했다. 그럴 수록 다이의 걱정은 커졌지만. "머리가 좀... 너무 오래 잤나봐. 그래 너무 오래 자서 그래." 셔릴의 눈부신 미소에 다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셔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이가 가져온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 ... 쿨럭.." 쨍그랑. 셔릴의 손에서 떨어진 스푼이 맑은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미안, 다이." 당황한 쪽은 오히려 다이였다. 다이는 서둘러 스푼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퍽" '... ... 미안해...정말 미안해... 다이..' 두꺼운 쟁반으로 다이를 내려친 것은 셔릴이었다. 마족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는 다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왕에게서 열쇠를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선택은 다이일 수 밖에 없었기에. 셔릴은 아까의 병자의 모습과는 달리 민첩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얼굴을 붉게 만드느라 시트를 뒤집어 쓰고 있었더니 온몸이 땀에 절어 축축했다. 잠시 동안 쓰러진 다이를 내려다 보던 셔릴의 얼굴에 드디어 굳은 결심이 나타났다. 셔릴은 힘들게 다이를 침대로 끌어올렸다. 우선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과 발도 묶었다. 다이의 허리춤에서 열쇠도 풀어내어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이의 머리끝까지 시트를 덮어씌웠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서너시간 동안 마왕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또 여느 때처럼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면, 또 몇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셔릴은 어떻게든 다시 에모리 공국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저... 지긋지긋한 마왕을 보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셔릴은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마왕의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열쇠. 열쇠를 문에 난 작은 구멍에 넣고 돌리자 딸깍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셔릴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셔릴의 눈 앞에 어둡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꿀꺽" 셔릴은 침을 한번 삼키고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XI. 레이 셔릴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무작정 복도를 뛰어오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야, 어떻게 해야 에모리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셔릴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신을 끌어들였던 그 붉은 수정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무수히 많은 문들을 지나쳐 왔다. 그 중에서 반 정도는 잠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방에서도 붉은 수정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셔릴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조금 있으면 마왕이 방을 돌아올 시간이었다. 혹시 복도에서 이렇게 서성이다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셔릴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복도에 끝도 없이 나타나는 방들. 무작정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셔릴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온 痼潔駭? 그것도 자신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발소리였다. 셔릴이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 열린 방의 불빛이 유혹하듯 셔릴에게 손짓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셔릴은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깍" 셔릴은 황급히 문을 닫았다. 금방이라도 저 마왕이 따라 들어올 것만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셔릴은 천천히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꽤나...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마왕의 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방도 역시 운동장처럼 넓었고 값비싸 보이는 귀금속과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만 이방의 주인은 치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듯 옷가지며 장식품, 이불 등등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는 것이 마왕의 방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랄까--물론 마왕의 방도 루퍼트 자신이 청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셔릴은 이방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왕이 지나가고 나서 다시 출구를 찾기로 결정했다. 그때였다. 이 방의 저 자색 침대위에서 반짝거리는 붉은 수정을 본 것은... 셔릴은 침을 삼켰다. 저 수정... ... 마치... ... 에모리의 신전에서처럼... ... 자신이 처음 이 세계로 내동댕이쳐지던 날처럼... ... 빛을 발하고 있었다... 셔릴은 주춤주춤 수정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돌아갈 수 있다. 저 수정에 손을 대기만 하면... 이제... 셔릴은 빛을 발하는 붉은 수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셔릴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셔릴은 여전히 그 자색 침대 위에 앉아 수정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 것은. "그 수정이 갖고 싶나?" 셔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워낙 어지러운 방이라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 왔는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저...아니...난 그저...흠... 당신 어디 있는거지?" 셔릴은 혹시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겸연쩍게 허공에다 대답을 했다. "그저?..큭.. 재미있는 대답이로군." 스르륵. 갑자기 웬 천 덩어리가 움직인다 싶다니 어느새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방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어 셔릴이 눈여겨 보지 못했던 등받이 의자에서 누군가가 일어선 것이었다. '이건 또 뭐야? 젠장..' 쫓겨 들어오느라 방안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건 그렇고 이 마족녀석들은 모두 이렇게 존재감이 희박한가? 지난번 마왕 놈 때도 스르르 나타나 사람을 놀래키더니 이 녀석도 어떻게 있는 줄 조차 모르게 앉아 있었다니...재수없어.. "딴 사람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다니...마족들은 예의란 걸 모르나?" 재수없는 상대에게 셔릴의 (주제도 잊고 던진) 힐난이었다. "뭐...? 예의? 파하하하하핫!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 그게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 수정을 훔치려한 자가 할 말인가?" "... ... //// ///// ... ..." 셔릴의 얼굴은 붉어졌다. 잊고 있었다...젠장. "훔, 훔치려던 게 아니야. 다만... 조,좀... 보고싶어서..." 젠장, 다이가 된 건가...? 말을 더듬다니... 그건 그렇고 저 심술궂은 웃음이라니...젠장. 상대방이 셔릴 쪽으로 다가오자 셔릴은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젠장...가까이서 보니까 더 심술궂다... "꿀꺽" 셔릴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크하하하하핫, 뭐야, 겁먹은 건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 남자는 방안이 터져나가라 웃음을 또 터뜨리며 다시 셔릴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눈앞에서 그의 금발이 햇빛(-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햇빛이라 추정되는 빛-)을 받아 춤을 추듯 반짝거렸다. 마왕과 필적할 듯한 키, 마왕보다 조금 더 드러나 보이는 근육. 그리고... 보라빛 눈동자.. 장난기 가득한 보라빛 눈동자가 셔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선명한 보라색 눈깔... ...젠장... 이놈도 귀족아냐?' 셔릴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쳇. 겁 먹긴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 "후훗. 아닌가? 그럼 누굴 피해 그렇게 황급히 내 방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지?"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순간 움찔하는 셔릴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곧...나갈꺼야. ... ... " "그래? 곧. 언.제.?" "... 좀...ㅂ...제길....에잇 젠장..자...잠깐만 봐,봐줘" 셔릴이 어렵기 입을 떼었다. 이런 녀석--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런 녀석에게 "부탁"을 하다니... 정말... 싫다... "... ... " 녀석의 얼굴에서 빙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쑤욱하고 셔릴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으, 으앗, 뭐야?" "... ..." "뭐, 뭐냐니깐!" "희한하군.." "뭐, 뭐갓!" "...검은색 눈, 마족 중에 검은색 눈동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어찌된 거지?" "아, 아, 알 피,필요 없잖앗!" 셔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도대체 뭐야? "흠... , 그런데 아까도 물은 것 같은데 왜 성내에서 도망다니고 있는 거지? 죄라도 지었나?" "... ... " 이번에는 셔릴의 말문이 막혀벼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로 왔고, 마왕놈에게 반항하다가 강간당하고, 자신을 돌봐주던 다이를 때려눕히고 도망 중이란 얘기를 할 순 없잖은가? "흠... 말할 수 없다는 건가? 그럼, 누구한테서 도망치고 있는 건지는 말해 줄 수 있나?" 녀석의 빙글거리는 웃음 때문에 "전혀" 말하고 싶은 신뢰감이 생기지 않았지만... ".. .... ... 마, 마와...ㅇ" "마왕? 루퍼트를 말하는 건가?" 마왕놈의 이름이 루퍼트였던가?... ...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그래... 다이가 "루퍼트님"이라고 했었지... 끄덕. 그때였다. 청천벽력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레이! 레이 방에 있나?" 문 밖에서 들려온 것은 바로 루퍼트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엄청 급한 목소리로 문까지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레이! 루퍼트네." XII. 위기 셔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벌써 들킨 건가?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기 숨은 줄 알고 찾아왔지? 복잡한 머릿속. 그런데 어, 어엇, 뭐야? 레이라고 불린 상대가 성큼 다가오더니 셔릴을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너무 놀라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입만 떠끔거리는 셔릴. 그리고 차가운 레이의 손이 셔릴의 키톤--마왕의 다 찢어 놓았던 것을 융통성 없는 다이가 서투른 바느질로 이어 붙여준-- 속으로 스르르 들어오더니 셔릴의 다리를 쓰윽하고 쓰다듬었다. 붉은 키톤이 허리까지 밀려올라가 셔릴의 흰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뭐얏!" 셔릴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도 잊고 버럭 소리쳤다. "쉬잇... 루퍼트에게 들키고 싶지 않거든 조용하라구... 아님, 신음소리라도 내든가" 레이의 얼굴에는 어쩐지 이 상황을 철저히 즐기고 있는 듯한 심술궂은 웃음이 걸렸다. 셔릴이 입을 꾹 다물자 이번에는 셔릴의 허벅지 바깥쪽에 입술을 갖다 대더니 빨아대기 시작한다. 으아앗, 차라리 마왕에게 잡히고 말지 이 미친 놈한테서는 도망쳐야 해! 정신이 든 셔릴이 다리를 버둥대며 레이에게 발갈질을 했다... 아니, 하려다 그의 손에 다리가 잡히고 말았다. 씨익~ 레이가 셔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자 셔릴은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미친놈, 변태놈, 마왕같은 놈, 아니, 마왕보다 더한 놈. 재수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변태 놈에게서 도망왔더니 이쪽도 변태... "레이! 방안에 있는 것 알고 있어. 들어가네!" 루퍼트의 목소리는 참을성을 잃고 있었다. "루퍼트! 기다려! 나간다구!" 한번더 셔릴을 향해 미소를 지은 레이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셔릴의 얼굴위로 시트를 둘둘 말아 던졌다. "얼굴 잘 숨기고, 숨도 쉬지 말라구, 이쁜이!" 누구더러 이쁜이란 거야! 셔릴은 발끈 했지만 일단 녀석이 떨어져 나갔다는 데 대해 안도감을 느끼며 서둘러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잠시후 레이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루퍼트가 씩씩대며 들어왔다. "뭘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시트를 뒤집어쓰고 누워 셔릴은 평소 자신에게는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마왕에게 저런 감정이란 것이 있었나 생각하고 있었다. 곧 이어 저 느물대는 심술금발의 목소리. "아... 루퍼트...뭔가, 이 시간에.... 예의가 없으시군." 흐트러진 옷섶을 여미며 레이가 말했다. "예의라구? 마족답지 않은 소릴 하는군. 게다가 이. 시간에... 라구? 레이 자네가 뭐, "이. 시. 간. 에." 특별히 할 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너무 바빠 국정 회의 때 도망쳐 자네 방으로 왔나? 이. 시. 간. 에? " 루퍼트 특유의 빈정대는, 하지만 웃음이 담긴 목소리. 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인생은 선택 아닌가? 난, 아주 바쁜 일이 있었거든." "그래?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자네, 지금 리가의 가넷石 채취에 대해 나랑 잠깐 얘기할 수 있겠나? 자수정의 증폭제가 될 지도 모르겠네만.." "아, 아, 잠깐, 친애하는 왕 루퍼트시여. 내가 말했잖나. "바쁜" 일이 있다고." 레이는 "바쁜" 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침대 쪽으로 흘끗 눈길을 주었다. 레이의 눈길을 따라가던 루퍼트의 시선이 레이의 침대위 시트 사이로 비죽 나와있는 하얗고 가는 다리로 향했다. 매끄러운 다리에 유난히 붉게 키스마크가 남겨져 있었다. 루퍼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레이를 바라보자 레이는 '다 알면서 뭘 그래'하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흠... 흠... 충실한 신하 레이마르군. 바쁜 일이 있었군. 흠. 가넷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럼 계속하시게나." "고맙군."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열어주며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함박 미소를 띠고서. "젠장. 그렇게 쫓아내지 않아도 나간다구. " 루퍼트의 투덜거림이 멀어져 갔다. 셔릴은 레이의 시트에 얼굴을 숨긴채 숨도 쉬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심장은 제멋대로 뛰고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왔다. "이봐, 이제 방해꾼은 사라졌어." 레이가 싱글벙글거리며 시트를 젖혔을 때 셔릴의 얼굴은 긴장과 땀으로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럼 계속 하자구." 순간 레이의 손이 셔릴의 다리를 따라 자색 키톤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짓이야!" 셔릴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변태소굴이다. 잠시나마 이 심술금발 녀석이 좋은 놈일지도 모르겠다고... 고맙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바보스러웠다. "쉬~~ 루퍼트가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내가 살려 주었느니 그 대가도 받아야겠고, 그리고..." "... ... " 셔릴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대신 레이를 사납게 노려보며.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은 레이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노려보면... 도발적이라구. " 갑자기 레이의 입술이 셔릴을 덥쳐왔다. 셔릴은 그의 가슴에 두 손을 얹어 떠밀려 했다. "안돼..." 하지만 레이의 입술이 입술을 덮는 바람에 셔릴의 항의는 파묻히고 말았다. 레이의 입술은 단단하고 노련했다. 그의 입술이 셔릴의 입술위로 움직이며 셔릴을 맛보고 희롱했다. 처음 입술이 닿는 순간 숨이 막혔다. 몸을 빼려했지만 레이는 그 정도 반항쯤은 예상한 듯 셔릴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손바닥이 셔릴의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다른 쪽 손은 셔릴의 어깨를 내려가 등을 쓰다듬었다. 레이의 입술이 입술 위를 오가며 셔릴을 거칠게 빨아 들이는가 하더니 어느새 손이 셔릴의 키톤을 어깨에서부터 끌어내리고 있었다. "시, 싫어!" 셔릴은 온몸으로 레이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워낙 단단히 끌어안겨 있는 터라 그의 반항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레이는 셔릴을 무시하고 점차 입술을 셔릴의 목에서 어깨, 그리고 가슴으로 옮겨갔다. 잊고있던 고통이 떠올랐다. 그날, 마왕에게 당한 치욕이 셔릴의 뇌리를 점령해갔다. "싫어! 떨어져, 이 변태 자식아! 내 몸에 손대지 말란 말이야! 으윽.. 너 따위 죽여 버릴 거야, 손대지 말라구..흐흑." 셔릴이 자신을 탐하고 있는 레이의 등을 미친 듯 두드리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셔릴의 얼굴에서 흘러 내렸다. 레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셔릴에게서 몸을 떼고 놀란 눈으로 셔릴을 내려다 보았다. 셔릴은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쉴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꼭 감은 눈, 셔릴의 목에서 가슴, 배까지 아로새겨진 자신의 키스마크. 헝클어지고 구겨진 셔릴의 옷은 어깨에서 끌어내려지고, 다리에서 끌어올려진 채 셔릴의 하얀 몸의 떨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흑.. 죽어..버려... 손대지 마..흐흑" 셔릴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레이가 자신에게서 몸을 떼었다는 것도 모른 채 흐느끼고 있었다. 레이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레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셔릴의 어깨를 안아 일으켰다. 셔릴의 눈동자가 커졌다. 레이는 셔릴을 부드럽게 안고 셔릴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너에게 손대지 않을께. 손대지 않아... 괜찮아.." 부드러운 레이의 목소리. 얼마간 셔릴의 훌쩍임이 잦아들더니 방안에 침묵이 깔렸다. 울음을 멈춘 셔릴은 힘을 다 소진한 듯 멍하니 레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런 셔릴을 내려다보던 레이가 머뭇거리는 듯 고개를 숙여 다시 셔릴의 입술을 덮었다. 이번에는 입술과 손에서 힘을 빼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난폭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키스임에는 변함없었다. ... ... 셔릴은 그저 멍하니 미동도 않은 채 그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잠시후 착찹한 표정으로 레이가 입술을 떼었다. 반항도 하지 않았지만 반응도 없는 키스였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군. 섭섭하지만 뭐, 기다리지, 이쁜이.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잠시 겸연쩍은 웃음. "이쁜이, 너한테 반한 것 같으니까..." XIII. 부탁 1 "퍼억" 셔릴의 주먹이 레이의 복부를 강타했다. 별로 위력이 있는 펀치는 아니었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맞은 레이에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셔릴의 외침. "이쁜이라고 부르지 말앗! 이 심술변태야!" 멍하니 셔릴을 바라보던 레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쨌거나 최악의 상태는 넘긴 것 같군. "푸하하하핫. 심술변태라고? 푸하하하핫. 재미있군. 넌 화내니까 더 이쁜데, 이쁜이. " "이쁜이가 아니라니까! 난 셔릴이다. 셔릴 포프." "아~ 이름이 셔릴이었군, 이쁜이. 그럼 정식으로 인사할까. 나는 레이. 정식으로는 레이마르 라블란스크. 뭔가 기억나는 것 없나?"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셔릴은 멀뚱멀뚱 레이를 쳐대보았다. "정말, 없나? 이거 실망인데... 힌트를 주지. 황금. 장미. 신사...." "... ... ...???" "정말 모르나. 휴~ 이 레이님이 겨우 이 정도였단 말이지. 맘에 드는 이쁜이 하나 사로잡지 못하다니..." 셔릴은 이쁜이라는 말에 발끈 했지만 웬지 그의 너스레가 싫지 않았다. "황금의 레이, 장미의 공자 라블란스크, 아니면 마계 최고의 신사... 뭐,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나?" "... ... ... " 설레설레. "휴~ 너무 한거 아냐? 이런말 하긴 부끄럽지만, 황금의 레이는 궁정 내에서 꽤나 유명하다구. 너 도대체 ..." "쳇!" 셔릴은 비로소 코웃음을 쳤다. 황금의 레이라구? 흥이다. 심술의 레이나 닭살의 레이라면 몰라도. "쳇...이라구? 어떻게 이 레이님을 모르면서 궁중 안에 있었지? 너 마족 맞냐? 혹시 마족 아닌거 아냐?" 레이가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셔릴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정말 마족이 아니었나?" 어느덧 레이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끄덕. 어차피 숨겨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미덥지는 않지만-- 이 녀석에서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 ... 혹시... 인간인가?" 조심스럽게 레이가 물었다. 끄덕. 레이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스쳤다. "어떻게 인간이 루퍼트의 궁에 들어올 수 있었지? " 설레설레. "...몰라..."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셔릴 자신이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팔이라도 떼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 하고. 그런데 왜 루퍼트에게서 도망다니는 거야? 죄라도 지었나?" 셔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또... 말문이 막혔다. "...왜? 말하고 싶지 않아? 큰 죄라도 지은 건가?" 셔릴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레이는 이제 평소의 웃는 표정을 되찾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어?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정말 루퍼트의 뺨이라도 때린 건 아냐?" 콕콕. 심장을 쪼이는 느낌. 저놈. 무당이라도 되나? 독심술 하는 건가? 레이는 셔릴의 굳은 표정을 농담으로 해석했는지 말을 계속했다. "뭐, 걱정마. 루퍼트한테 잘 말해 줄께. 루퍼트놈 성질은 드럽지만.. 걱정마. 이 레이님이 막아 줄테니. 니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내 애인이라 그러지 뭐. 걱정마, 걱정마." 에잇, 저 놈은 꼭 잘 나가다가 맞을 소릴 한단 말이지. 셔릴은 사납게 레이를 노려보았다. 셔릴이 레이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레이의 붉은 수정이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여기서 이 녀석과 노닥거릴 시간 따위 없다. 마왕놈이 이제쯤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셔릴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기... 이 수정을 이용하면 공간의 이동이 가능한거지? "어? 왜? 우리 신혼여행이라도 갈까?" "... ..." 농담으로 셔릴의 말을 받던 레이도 셔릴의 굳은 안색을 보자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심이야?" 끄덕. "인간세계로 가고 싶은가?" 끄덕. "휴... ... 인간 세계라... ... 수정의 힘으로 인간세계로 간다...라...할 수는 있어." 셔릴의 눈에 간절한 소망이 어렸다.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럼?" "그래, 실제로 내가 해본 적은 없어. 그런 일은 보통 마족이라 해도 아무나 행하지는 않으니까. 인간따위..아, 미안.. . 불러봤자 별 소용도 없고. 게다가 어떤 것을 끌어당기거나 내보내는 것은 수정의 의지에 의해서도 좌우되거든." "수정의 의지라니... 무슨 소리야?" "말그대로. 우리 마족들의 상징인 붉은 수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의식체라고 할 수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마족들의 무의식의 집약체인 동시에 의식의 촉매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수정의 이용해서 우리의 힘을 증폭시킬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수정 자체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들었어. 어떻게 보면 수정의 주인의 무의식을 수정이 발현시킨다고나 할까..." "젠장, 그딴 것 난 몰라. 그냥 날 인간세계로 돌려 보내 달라구!" 셔릴은 머리속이 복잡했다. 힘의 증폭이니 무의식의 발현이니... 생각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힘으로 보내주면 되잖아. 당신 귀족이라는 것 알고 있어. 보라색 눈이니 혈통도 좋겠고, 그러면 마력도 강할 것 아냐. 수정의 의지 따위 무시해 버리고 당신의 의지로 날 보내주면 되잖아!" "어...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냐." "...또 왜?" "우선 짐작컨대 넌 루퍼트의 수정을 통해 이 세계로 온 것 같군." "그렇겠지." "그렇다면 네가 온 경로는 두 가지로 나뉠 수가 있지." "... ... " "루퍼트의 의지와, 루퍼트의 수정의 의지야." "... ... " "그리고 두 가지 경우 모두... 난 너를 돌려보낼 수 없어." "... ..." "루퍼트의 의지에 의해 네가 왔다면 그건 루퍼트에게 맡길 일이지... 그리고... 수정의 의지라면... ... 그건 더 복잡해져. 루퍼트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너를 원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까." "무슨 소리야!" 셔릴이 소리질렀다. 이제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았는데 이 녀석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마왕 놈이 날 원해서 데려왔을 리 없어! 아니, 날 죽이려고 데려온 건지는 몰라. 하지만. 젠장! 놈에겐 내가 필요없어! 그냥 벌주려고 끌고 온 거라구! 내가 자신을 비난했기 때문에 화풀이하려고 데려온 거라구! 그러니까 보내줘. ... ... 당신 힘으로. 날 살리는 셈 치고 보내주면 되잖아. .." "... ..." 레이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셔릴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 ... ... ... 제발..." "... ... ... ..." "... ... ... ..." "... ... ... 미안하다..." "왜!!!!!!!!!!!!!!"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던 셔릴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한한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루퍼트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내 맘대로 널 보내줄 수는 없어...." 레이는 여기서 살짝 말을 끊고 셔릴의 표정을 살폈다. "걱정마. 루퍼트에게 잘 말해서 널 보내주라고 할께. 날 믿으라구. 그나저나 아까운데. 우리 이쁜이랑 겨우 키스 한번으로 헤어져야 한다니...마음 바꾸면 안될까? 결혼해서 살자니깐. 아님..그래! 내가 너희 세계로 갈까? 이봐, 듣고 있는 거야? 난 진심이라구." "... ... ..." 셔릴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셔릴의 마음속에는 절망감만이 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 졌다. 여러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널 찾는 건가?" "아마도..., .... 분명히... ..." 절망이다. 그런 셔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가 셔릴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루퍼트에게 얘기해 줄께." 셔릴은 절망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제발... ... "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마. 영원히 내 것으로 해버리고 싶어지니까. 내 맘 변하기 전에 루퍼트에게 가자구." 셔릴은 레이가 잡아끄는 대로 복도로 나와 루퍼트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왜 이런 지경에 빠졌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도망가려고 했는데... 거의 도망갈 수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꼬여 버린거지? 루퍼트의 방으로 걸어갈수록 셔릴의 발걸음을 더욱 무거워졌다. 과연 저 마왕놈이 날 놓아줄까? ... ...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내 몸에도 관심이 없고... 최근 들어선 별로 때리지도 않았고.... 무시하고 있으니까... ... 이제쯤 귀찮아 진 건지도 모르지... 레이를 따라 걸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셔릴은 갑자기 레이가 멈춰서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셔릴이 고개를 들자.... 복도 저 편에 팔짱을 낀 채 차갑게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마왕이 눈에 들어왔다... XIV. 부탁 2 ... ... 차갑다... ... 얼어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셔릴은 마왕의 시선에 긴장하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어느새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꽈악.. 그런 셔릴을 알아챈 것일까. 레이가 셔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왔다. "아! 루퍼트! 왠일인가! 그런 무서운 얼굴로!" 레이가 루퍼트의 표정 따위 개의치 않고 싱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 ... ... ..." 루퍼트는 대답없이 셔릴을 노려보았다. "아하, 친애하는 루퍼트 폐하, 제 옆에 있는 이쁜이가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으신 듯 하군요." 루퍼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이쯤되면 한기에 몸이 떨릴만도 하련만 레이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요. 폐하의 심미안은 이 궁정 내에서도 유명한 바, 이쁜이의 미색을 눈치채지 못하셨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런데 실은 마침 이 이쁜이의 일로 폐하를 찾아뵙던 길이었습니다. 소신 미천하여 앞뒤 경꼭?잘 알 수 없으나, 이쁜이가 인간계로 돌아가기를 몹시도 그리워 하는 듯하니 폐하께서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이쁜이를 다시 인간계로 돌려보내 주시기를 감히 청하는 바이옵니다. " 차가운 침묵이 복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신경이 약한 사람이라면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긴장감이 세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 ... 어찌된 일이지?" 마침내 루퍼트가 으르렁 대듯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이를 악물고 있는 셔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폐하, 그렇게 노려보시면 이쁜이가 겁을 먹지 않사옵니까." 루퍼트의 시선이 그제서야 레이에게로 옮겨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강심장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크, 하긴... 제 미색도 만만치 않지요.., 하지만 폐하, 솔직히 폐하는 제 취향은 아니십니다. 잘못하면 제가 깔릴지도 모르는데, 폐하를 한번 깔아보고는 싶지만... 솔직히 전 이 이쁜이처럼 좀더 가는 선을 좋아하는 터라..하, 아쉽군요." 놀랍도록 무례한 말이었다. 말없이 레이를 노려보는 루퍼트. "친애하는 루퍼트 폐하, 다시 청하옵니다. 제가 이 이쁜이와 함께 인간계로 신혼여행을..." "그 폐하 소리 집어치워!" 드디어 루퍼트가 폭발했다. 그의 보라빛 눈이 더욱 깊어졌다. "뭐, 폐하가 원하신다면.... 루퍼트...이 아이.. 인간계로 보내주게." "... ... ... " "...부탁이네... 친구로써." 레이의 얼굴에서도 어느새 웃음이 사라졌다. "... ...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어." 루퍼트가 다시 던진 질문이었다. "루퍼트, 그건 말이지.." 레이가 대답하려던 찰나 루퍼트가 가로막았다. "자네에게 묻지 않았네, 레이! 대답해, 에모리의 건방진 인간!" 셔릴은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이 마왕놈에게 눌릴 순 없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당연한 것 아냐? 네 놈에게서 도망친거다." 셔릴은 레이의 휘둥그래진 눈길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네 놈을 죽이고 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뭐, 어찌됐거나 상관없군. 어차피 잡혀 버렸으니. 이제 죽여." 셔릴이 억지로 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의 저 보라빛 눈이 오늘따라 왜 이리 적자색으로 보이는 것일까... "네가 원했으니 후회하지 마라."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냉랭한 목소리. 셔릴도 루퍼트도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흠... 이봐, 루퍼트, 진정하라구. 도대체 우리 이쁜이가 자네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도 설명을 좀 해보라구, 젠장!" 레이가 참을 수 없었는지 끼어들었다. "레이, 자네는 이 녀석과 무슨 관계지? 왜 이 인간녀석이 자네랑 함께 오는 거지?" "이제야 나한테도 말문을 여시는군. 이 이쁜이와 나의 관계라 궁금한가? 뭐, 간단하지. 내 애인이야. 그럼 나도 하나 물을까? 자네랑 이쁜이는 무슨 관곈가?" "녀석은... ... ..." XV. 인노 "녀석은 나의 인노(人奴)다." 인노(人奴). 속칭 노예. 셔릴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이 지금은 마왕에게 붙들려 있는 몸이라 해도 셔릴은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고 자라왔다. 그런 자신에게 노예라니... 굴욕감이 밀려왔다. "인노라구? 네 녀석답지 않은 소리군. 지금까지 인간세상에는 일말의 관심도 안보이던 우리 루시퍼 폐하가 갑자기 인노를 거느리다? 그리고 하찮은 노예 하나가 탈출했다고 해서 이렇게 직접 자신이 수색을 나선다? 정말 자네답지 않아." 레이가 말했다. "그건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자, 이제 그 인간을 나에게 양도하겠나?" 루퍼트가 한걸음 셔릴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이가 셔릴의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는 안되겠는걸." "무슨 짓인가, 레이?" 루퍼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음...루퍼트. 아까 이미 말했지만. 젠장, 왜 자네는 친구의 말을 흘려 듣는 거지? 나는 여기 있는 ?이쁜이, 아니 셔릴을 내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니 그가 자네의 노예라 해도 한번쯤 나에게 양보할 수 없겠나?" 친구로써 말이야." "애인... 애인이라...진심인가?" "... ... ..." 루퍼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레이를 잠시 바라 보았다. "... ... 진심인 것 같군. 나 역시 의외로군. 궁정 안의 모든 여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황금의 레이가 인간 애송이에게 빠지다...자네답지 않아. 어디가 맘에 들던가? 녀석을 안았나?" "루,루퍼트 이 녀석.." 레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루퍼트는 레이의 뒤에서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셔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셔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미처 레이가 막지도 못한 순간이었다. "루퍼트!" "이것 놔!" 레이와 셔릴이 소리친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루퍼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셔릴의 옷깃을 젖혔다. 그곳에 드러난 것은 아까 레이가 만들어 놓은 울긋불긋한 키스 자욱들이었다. "아까 네 침대에 있던 것이 이 녀석인가?" 루퍼트의 낮은 목소리. "그,그래. 하지만 그건..." 레이의 황급한 변명, "들을 필요 없어." 루퍼트는 단호히 몸을 돌린채 잡힌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는 셔릴을 끌고 방으로 가기 시작했다. "루퍼트! 내 말 좀 들어봐, 들어보라구!" 레이가 다급하게 그들을 쫓아왔다. 루퍼트는 갑자기 레이를 향해 돌아섰다. 여전히 그 알 수없는 표정으로. 그리고 레이의 멱살을 잡았다. 몸집은 비슷했지만 루퍼트의 기운은 그 복도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충분한 압도감을 주었다. "루, 루퍼트. 내가 설명할게." "아니, 레이마르 라블란스크公, 마계의 왕으로써 말하지. 당신의 청은 반려되었다. 녀석은 왕의 노예. 감히 왕의 재산에 손을 댄 죄는 묻지 않도록 하지. 그리고, 레이. 친구 루퍼트로써 말한다. 녀석은 나의 색노(色奴)다. 인간계로 돌려보낼 일은 없어." "쾅" 망연자실한 표정의 레이 앞에서 루퍼트의 방문이 닫혔다. XVI. 소유 1 방문을 닫은 루퍼트는 셔릴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정적.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참을성이 부족한 쪽은 언제나 셔릴이었다. "흥, 색노라고? 내가 언제부터 더러운 너의 노예였었지?" 침착하게 상대의 비위를 긁는 것은 루퍼트 쪽. "아니었나? 네 녀석의 가치는 오로지 침대에서만 발휘되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것도 변변찮았지만서도. " "비열하고 더러운 자식!" "그래서 너는 그렇게 고결해서 레이에게 몸을 주며 인간세계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나? 그랬어?" "누..누가!" "상관없어. 니가 어떻게 레이를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한테는 보여주지 않은 기술을 발휘한 모양이지? 그럼 이제 주인인 나도 좀 즐겁게 해 주지 그래." 루퍼트가 옷깃을 풀어 헤치며 셔릴에게 다가 왔다. 호리호리하기만 해 보이는 그의 몸에 감추어져 있던 단단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퍼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셔릴이 침대 위에서 뒷걸음질쳤다. "소, 손대지 않는다고 했잖아!" 셔릴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담겼다. 루퍼트가 격렬히 키스해 오자 셔릴은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 머리에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그의 양손이 셔릴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거칠게 머리를 젖히고 뺨과 귓볼을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루퍼트가 셔릴의 뺨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는>이라고 했었지." 뜨거운 숨결이 셔릴의 귓전을 간질였다. 그의 입술이 셔릴의 목덜미에 닿았다. 루퍼트의 차가운 손이 셔릴의 목덜미로 다가오더니 셔릴의 가슴을 드러냈다.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살갗이 서늘해지더니 찢어진 옷이 스르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엔 걸레처럼 찢어져서 다이의 솜씨로 복구하기는 어림도 없겠다.) "싫어..." 셔릴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죽어도 녀석에게만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셔릴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루퍼트의 손길을 피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힘없는 셔릴의 주먹이나 발길질로 루퍼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짜악, 짜악!" 오히려 셔릴의 반항이 계속되자 루퍼트는 성가신 듯 셔릴의 뺨을 올려 붙였다. 붉게 부어오른 셔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루퍼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셔릴의 몸 여기저기에 찍혀 있는 선명한 키스마크들. 루퍼트는 셔릴의 목덜미에 난 키스마크 위로 입술을 묻고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레이가 해주니 좋던가? 응?" "..미..친 놈..! 아악" 셔릴이 루퍼트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며 내뱉었다. "안됐군. 레이가 더 이상 널 기쁘게 해 줄 일은 없을거야. 레이의 흔적까지 깨끗이 지워주지." 루퍼트는 셔릴의 두 팔을 들어 올려 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거칠게 셔릴의 찢어진 옷을 집어들고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야. 이거 풀어!" "네 행동에 대한 벌이지. 지난번 벌로는 별로 느낀 것이 없었던 모양이지." 루퍼트는 한팔로 셔릴의 묶인 손목을 고정시킨 채 다시 셔릴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는 레이가 남긴 키스마크 자리를 다시 깨물었다. "아..악.." 루퍼트가 깨문 이빨 지욱에서 피가 송글송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레이가 남긴 키스 자욱을 따라 입술을 움직여 내려갔다. "넌 내 거다. 내 흔적으로 덮어 버리겠어..." "개자식... 악.. .." 곧 셔릴의 몸 구석구석이 루퍼트의 이빨자욱으로 뒤덮였다. 이윽고 루퍼트는 셔릴의 허벅지 바깥쪽에 위치한 마지막 키스마크 하나를 자신의 입으로 지웠을 때 셔릴의 몸은 울긋불긋한 정도를 지나 이빨자욱에서 흘러나온 피로 시트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넌 온전히 내 것이다. " 루퍼트가 셔릴의 오른다리를 들어올렸다. 예고도 없이 루퍼트의 크고 차가운 분신이 셔릴의 애널을 파고 들었다. "아, 윽" 셔릴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살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애널을 파고들어오는 마왕의 페니스. 침도, 피도, 정액도 없이 오로지 힘에 의해 밀어붙여진 삽입이었다. 루퍼트는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페니스를 힘껏 셔릴의 애널에 밀어붙였다. 셔릴의 좁은 항문이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페니스가 반 정도 삽입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삽입이 되지 않았다. "...힘빼" 루퍼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으윽, 개자식... 죽어버려.." 셔릴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손톱이 살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으나 뒤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런 것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순간이었다. "퍼억" 루퍼트의 주먹이 셔릴의 복부를 명중했다. 숨도 쉴수 없을 듯한 통증에 셔릴이 정신을 놓은 사이 루퍼트가 끝까지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아악!" 루퍼트가 천천히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 점점 빠르게 루퍼트의 분신이 셔릴의 애널을 쓸었다. "으..음...좋아..." 루퍼트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셔릴은 눈을 감았다. 죽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듯한 아픔 속에서 셔릴은 마왕을 저주하고 또 자신을 저주했다. 셔릴의 하얀 몸이 힘없는 헝겊인형처럼 루퍼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루퍼트의 머리카락이 셔릴의 가슴을 쓸었다. 살과 살이 닿은 곳에서 피가 흘러나와 질퍽질퍽 소리를 냈다. 루퍼트의 팽팽한 근육에서도 뜨거운 땀방울이 떨어졌다. 죽어도, 온몸을 천만번 씻어내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촉이 셔릴의 애널에서 느껴졌다. "헉...좋아...으음...." 차라리 귀를 파내버리고 싶은 저 음성.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움직임... "아..윽...개자식..." 셔릴의 입에서 가느다란 비명과 함께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뒤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속에 뿜여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기억해 둬...너는... 뼛속까지... 영혼까지... 내 것이다.." 마왕의 뜨거운 입김을 귓가에 느끼며 셔릴은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는 의식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XVII. 전설 1 "셔,셔,셔릴님...약..." 다이는 약사발을 든 채 셔릴의 침대 근처에서 안절부절 서성대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셔릴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지 모른다. 셔릴은 루퍼트와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는 소리를 지른다든지 물건을 집어던진다든지 했지만--물론 그것도 그럴 힘이 있을 때 뿐, 평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이에게만은 놀랍도록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물론 그것은 셔릴 자신이 스스로 다이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저 성격나쁜 마왕놈이 자신을 놓친 다이를 가만 놔두지 않았으리란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것이 다이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한편 다이는 다이대로 셔릴이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셔릴이 탈출한 후 다이는 죽음을 각오했었다. 손속에 정을 두기 시작하면 마계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다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루퍼트는 역대 마왕 중에서도 가장 냉엄한 얼음의 정치를 펴왔지 않은가. 그런 루퍼트님이 어떤 변명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취해진 조치는 의외였다. 루퍼트는 침대에 묶인 채 낑낑대고 있는 자신을 한번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을 뿐--물론, 그 눈길은 다이를 꽁꽁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았다. 다만 루퍼트가 다시 다이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을 때, 루퍼트의 침대 위에--셔릴의 침대는 어느새 치워졌다--온 몸이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된 셔릴이 정신을 잃고 널부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루퍼트는 다이에게 셔릴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식사와 약을 먹일 것을 명령했다. 셔릴의 몰골에 다이가 경악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대체 이 갸날픈 셔릴님의 몸 어디에 때릴 구석이 있다고 셔릴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셨을까...도대체 루퍼트님은 왜 이렇게 셔릴님을 미워하시는 걸까... 다이의 놀람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분명히 셔릴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보를 갈아주고, 약을 발라주었는데도 다음날이면, 아니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셔릴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널부러져 있곤 했다. 자신이 챙겨주는 음식과 약을 꼬박꼬박 받아 먹는데도--다이가 셔릴에게 가장 감사하는 점이기도 했다-- 셔릴은 점점 더 수척해져 갔다. 혹시 이렇게 매일 피를 흘리는 것도 무슨 병이 아닐까... 지금도 다이는 약사발을 든채 혹시 셔릴의 잠을 깨운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 다이... ... 약이구나... 고마워...저기 놔둘래?... 나중에 먹을게..." 다행이다... 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셔릴은 멍한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동시에 온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려고도. 쟁반을 든 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이가 눈에 들어왔다. 셔릴은 다시 한번 약을 놔두고 가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무 죄없이 자신 때문에 시달리는 다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휴... 약 이리줘." 셔릴이 약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시자 다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셔릴은 약사발을 다이에게 넘겨주며 다시 침대로 파고들었다. 다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 다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흑..." 이불 안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참고 참았지만 서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온 울음이었다. "윽...흐...윽..." 매일처럼 계속되는 고문같은 섹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는 지도 모르고 갇혀 지낸 시간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이 모두 서러움이 되어 물밀듯 셔릴에게 밀려왔다. ... 한동안 계속되던 셔릴의 울음소리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셔릴은 이불 밖으로 눈을 빼꼼히 내밀었다. 하도 울어 새빨개진 두눈. 셔릴은 마치 잠이라도 자고난 사람처럼 두 눈을 비볐다. 눈물자욱을 지워야 했다. 죽어도 이런 모습을 마왕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셔릴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 가장 밝은 곳으로 향했다. 에모리의 성과는 달리 이곳 마왕의 궁성의 방들은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셔릴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방의 가장 밝은 곳을 창문으로 삼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늘 창가에 걸터 앉아 성아래 펼쳐지는 숲을 바라보던 것처럼 셔릴은 그곳에서 눈을 감고 고향에 돌아가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큼직한 의자를 끌어다 밝은 빛 속에 앉은 셔릴은 눈을 감았다. 유난히도 험준한 에모리의 산들, 그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니브市, 지금까지 자라왔던 왕궁, 부모님, 따뜻한 유모의 손길. 가끔은 답답한 왕궁을 벗어나고 싶어 근위병들의 눈을 속이고 몰래 마을로 놀러가기도 했었지. 그리운 릴리아 광장, 나의 국민들. 언제나 사람을 움추러들게 했던 신전. 신비스런 분위기가 어린 나를 끌어당겼지. "... ... ...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슬픈 사랑에만. 빠지도록. 설정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도... 슬픈 결말로만... 끝나버리도록.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어.... 긴 긴 기도로... 기원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는. 않아주었어... 그들은 매일 눈물을 흘려... 그 눈은 마치 호수와 같아... 그러나. 두 눈을 잃어도. 슬픈 사랑만은 않기를,...슬픈 사랑만은 않기를, .슬픈 사랑만은 않기를. 그들은 매일 기도했어, 기도했어.... 님을 잃고, 맘을 잃고, 시름을 얻어, 영원토록......" 셔릴의 입술에서 저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꿈결같은 목소리였다. " ...기도를 들은 마왕이, 소원을 들어 주기로...빛나던 두 눈대신,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어... 물빛 하늘도, 연두색 오월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안녕이라고..." 그때는 몰랐다. 이 노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앞으로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이제는 행복해질 거라고.....암흑 속에서라도, 행복해질 거라고, 어둠 속에서라도, 행복해질 거라고,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 "... ... ...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 ... ...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 ... . ..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이제는..."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지?" 난데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깜짝 놀란 셔릴은 눈을 돌렸다. 그곳에 마왕이 있었다. 소리도 없이 들어온 루퍼트. 아니 그것은 셔릴의 정신이 온통 이곳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처음 이곳에 온 날과 마찬가지로 마왕은 방안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셔릴을 지켜보고 있었다. 셔릴은 마왕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오랜 동안. ..마음의 빛을 잃은 그들은... 세상의 빛도 잃고, 아무런 위안도 없이.... ... 빛을 잃고, 맘을 잃고. 시름을 얻어. 영원토록...... ...." 셔릴의 노래가 그쳤다. 셔릴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 역시 기둥에 기댄 자세 그대로 말없이 셔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 ... 누구의 노래지?" 루퍼트가 입을 열었다. "나의 노래... 내 부모님의 노래... 온 에모리의 노래지..." 셔릴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인간세계의 전설이란 말인가?" 셔릴이 고개를 돌려 루퍼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전설이 아니란 것 쯤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당신 자신이 한 짓 아닌가?" 한번쯤 꼭 따져보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왜 에모리인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는지, 왜 저주를 내렸는지. "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 ... 그건..그건.." 그건...모두들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전설. 사람들은 누군가 눈이 멀거나, 목숨을 끊을 때면 그렇게 말해왔다. 그 모든 것이 마왕의 저주라고. 풀 수 없는 마왕의 저주 때문이라고... "훗, 말할 수 없다는 건가? " "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면 왜 모두들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지?" "이런, 내말을 오해한 것 아닌가? 내가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럼 역시 당신이군...왜..." "왜 그랬냐고? 알고 싶은가?" 끄덕. 진심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군. 덤비지 않는건가?" 루퍼트가 놀리듯 말했다. "... ... ..." "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온 건지 모르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해줘...왜...그랬..." 셔릴이 말을 흐렸다. 괜히 루퍼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루퍼트가 입을 닫아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루퍼트도 마찬가지였다. 섹스 할 때 외에는 얼굴을 보는 일도 없었지만, 셔릴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거지?" "모두다... 왜 그랬는지. 왜 에모리 사람들은 슬픈 사랑만 하도록 운명지워 졌는지, 왜 사람들의 기도에 대답했는지, 왜 그들의 눈을 원했는지, 왜 약속했는지, 왜 약속을 저버렸는지, 왜.." "그만. 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묻고 있군." "... ... ..." "그리고 무엇보다... 넌 한가지를 착각하고 있군." "..... ... ??" "그것은 에모리 인간들이 자초한 일이다. 우리 마족이 시킨 일이 아니야." XVIII. 전설 2 무슨 소리야. 이 마왕녀석. 또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셔릴은 속이 탔다. 벌써 세 번째다. 자초라는 말을 들은 것. 또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일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뭐, 인간들의 전설에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 하긴 그런 편이 자신들을 동정하기 쉬웠겠지." "무슨 소리냐니까! 말해!" 갑자기 루퍼트가 일어선 바람에 셔릴도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루퍼트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뭐...뭐..." 루퍼트가 셔릴의 턱을 붙잡았다. 또 키스인가...루퍼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왔다. 셔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셔릴의 바로 눈앞에서 루퍼트의 고개가 멈췄다. 셔릴의 검은 눈동자와 루퍼트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늘 정말 이상하군. 앙탈 부리지 않는건가?" 루퍼트가 놀리 듯 중얼거렸다. "... ... ..." 셔릴은 루퍼트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알고 싶은건가? 훗" 루퍼트가 미소짓는가 하더니 갑자기 셔릴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겹쳐왔다. 셔릴은 눈을 감았다. 견뎌 내야 하리라... 그러나 루퍼트의 차가운 입술은 셔릴의 입술에 살짝 닿는가 하더니 이내 떨어져 나갔다. 가벼운 입맞춤. "긴 이야기다. 서서 듣기에는 힘이 들텐데?" 루퍼트는 자신의 침대로 가서 편안히 앉았다. 셔릴은 침대에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는다. "왜... ... 약속을 어긴거지? 당신... 눈과 사랑 둘 중 하나는 에모리인들에게 주었어야 했잖아..." "참, 대답하기 전에 또 하나 밝혀두지. 인간과 계약따위를 한 건 내가 아니라는 것." "...무슨 ?... ... 당신이... ... " "그래, 내가 마왕이지... ... ... 에모리 인간들과 계약을 한 것은 선대 마왕 베이닉스였고..." "서, 선대 마왕?" " 훗, 설마 마족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니겠지, 꼬마?" "... ... ... " 몰랐다... 그저 마족은 그 강력한 마력이 있기에,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가 하고 믿어왔을 뿐... "큭,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군. 마왕은 신이 아니야. 마족들의 왕일 뿐이라구...큭..우습군... 불로불사의 마왕이라... ... ... " "... ... ... " "우리 마족이 인간족들보다 훨씬 오래 사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절대'는 아니야." "그, 그러면 서,선왕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아버지? 크..하하하하하핫. 아버지...! 아버지라!!!" 갑자기 루퍼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셔릴이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루퍼트는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핫...하..과연 인간들이란..." "... ... ..." 샐쭉하게 루퍼트를 노려보는 셔릴. "하...하..숨이 차군. 꼬마. 물론 너는 이 마계에 대해 잘 모르겠지.. 하지만 '아버지'라니..큭...너무 하잖아... 그런 말을 하면..큭 선왕 베이닉스가 무덤에서 일어난다고...큭... 큭.큭... 겨우 죽여서 자빠뜨려 놓았는데 말이야..." "뭐, 뭐? 왕을 죽이고 마왕이 되었단 말이야?" 루퍼트는 셔릴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 마계의 법도지. 강한 자가 아니면 이 마계를 지배할 수 없어. 마왕은 언제나 선왕을 쓰러뜨리고 되는 거라구. 아니, 현명한 마왕은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지. 멍청한 베이닉스는 그 때를 몰랐던 것뿐.... ... 단세포 녀석이었지... 인간과 거래를 한 것만 봐도..." "그럼... 에모리의 기도를 들어준 건...베..이닉스?" "그래. 그리고 에모리인들이 인간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족과 왕래를 한 것은 그것보다도 이전이었지." "... ... ...??" "그 표정은..뭐야?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거 처음부터 가르쳐야 해?" XIX. 전설 3 셔릴은 혼란스러웠다. 에모리의 왕자로써 배워온 모든 것. 인간으로써 배워 온 모든 것이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저 오랜 옛날부터,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에모리족과 우리 마족을 소통해 왔다고 한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에모리족은 자신들의 운명을 끝내줄 구원의 힘을 우리 마족에게 바랬는지도 모르지.." "에모리족의...운...명...?" "에모리족들은 태초부터 사랑이 불가능했지. 아니, 사랑의 끝이 행복하지 못했지. 그렇지 않나?" "그, 그러면...?" "그래... 그게 마왕의 저주가 아니.." "마왕의 저주 따윈 태초부터 없었다. " "거..거..짓말..." 거짓말이다. 저 사악한 마왕놈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셔릴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믿건 말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어쨌건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에모리인들의 신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강박. 자신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고야 만다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는 신념. 아님, 단순히 창조주의 장난일지도...큭. 장난치곤 잔인하지?" "창조주의... 장..난... 말도 안돼." 말도 안되는 소리. 말도 안되는 소리... 루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에모리족은 우리 마족과 소통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가 있었지." "... ... ... " "그래서 다른 인간족들은 에모리인들을 경외시했다. 마족과 교류하는 인간. 그래서 그들이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천형을 받은 것이라고 수근거렸지." "... ... ..." "그러다 그 단세포 베이닉스가 일을 저질렀다. 멍청한 놈." "... 에모리인들과 전쟁이라도 일..으켰나?... ... " "비슷해." 그렇다면 말이 된다. 마력을 가진 마왕은 그후 에모리인들에게 저주를 내렸다. 失明이라는..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 멍청한 놈. 그것도.... " 셔릴은 숨을 죽였다. "...정혼자가 있는 여자와." 충격. 셔릴은 잇다른 충격에 루퍼트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루퍼트가 말을 이었다. " 그 멍청한 놈은 마왕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인간 여자에게 빠져 들었던 모양이다. 꽤나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인간계에 머무르는 것도 서슴치 않았지. " "... ... ..." "그 인간여자가 베이닉스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영리했어. 베이닉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했지... 무엇일 것 같나?" "... ... ...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 뿐만 아니라, 여자는 베이닉스의 마력까지도 원했다." "마...력?" "인간 여자는..베이닉스에게 말했다고 하더군. 자신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베이닉스일 것이며, 그러면 베이닉스와 결혼하겠다고. 베이닉스와 결혼해 마계에서 살기 위해 마력이 필요하다고." "... ... ..." 셔릴은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얘기가 루퍼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이닉스는 여자의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모리족이 행복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마왕의 힘이 아니라고..." "그래, 그래서 베이닉스가 멍청한 놈이라는 거지. 자신의 힘에 부친 짓을 한거다." "... ... ... "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어 여자의 의식을 바꿔놓으려 한거지. 한 인간의 기억을. 무의식을 완전히 고쳐놓으려 한거다. 여자의 무의식에 사랑에 대한 신념을 마력으로 심으려고 한거지. 무리를 해서라도." "... ... .. " "어쨌거나 베이닉스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러면..."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베이닉스가 아닌 다른 인간과. 자신의 정혼자를 사랑하게 되었지. 큭. 그리고 그 인간과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여자는 믿었다. 큭. 베이닉스의 노력의 결과였지." "... ... ..." "그후, 베이닉스의 꼴은 우스워졌어. 마족과 에모리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했지. 에모리족 전체를 철저히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실명의 저주..." "맞았어. 베이닉스는 에모리족 전체에 실명의 저주를 내렸다. 하지만, 베이닉스가 바란대로 무차별적으로 모든 에모리족이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 "... ...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 ... 그런건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버린 거지." "그럼... 베이닉스는...? 당신이 죽이기...전에는...?" "훗. 베이닉스 놈. 마력의 절반을 인간여자에게 낭비하고는, 남은 절반은 저주에 낭비했지... 오래전 일이다." "... ... ..." " 그리고 마력을 잃은 놈은 순서에 따라 제거되었다." "제거... ... ..." 셔릴은 멍청히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맞닥뜨린 이 거대한 진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셔릴은 몰랐다. 그저 멍하니... 마왕놈의 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되뇌이고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흠...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나?' 루퍼트는 침대에 편히 기대며 셔릴의 얼굴을 보며 빙글거렸다. 마치 셔릴의 충격받은 얼굴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서... ... 그..러면... 당신도..." XX. 소유 2 셔릴은 루퍼트를 똑바로 보지 못한채 물었다. 혹시나 루퍼트를 또 폭발시키지 않을까. "큭...큭큭... 네 녀석이 겁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하하하하핫,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러니까..이 루퍼트도 언젠가는 죽임을 당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건가?" "... ... ... " "그리고 넌 그것을 바라고 있겠고 말이지... 크..큭.." 루퍼트의 얼굴에는 조금도 화난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 걱정마라. 꼬마. 나는 이제 막 마왕의 자리에 앉았다. 아직 몇백년은 더 다스릴 수 있지. 게다가.. 내가 지겨워지면 언제든지 자리를 물려줄 녀석도 이미 내정되어 있단 말이지. 그전에는 날 죽이려는 녀석은 도륙될 뿐. 내가 먼저 죽임을 당하는 일 따윈 없어." "다음 마...왕...?" "내 다음 자리는 레이가 잇는다." "레..레이...?" "녀석. 마력이 점점 강해지는 타입이지. 몇백년 후면 충분히 강해질 거다. 이 마계를 다스릴 수 있을만큼." "레...레이...그...레이?" "그래. 레이마르 라블란스크.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너를 안았던 레이. 아니, 니가 자진해서 몸을 바쳤던 레이인가?" 루퍼트는 여느 때처럼 빈정거리는 빛을 되찾았다. 오늘은 이정도로 자상한 역할을 했으니 이제 그에 상응하는 나쁜 주인역을 해야겠다는 식이었다. "이...이 더러운 자식. 누..누가... 몸을 주었다고 그래! " 셔릴은 두 주먹을 쥐었다. 안그래도 심란한데 불을 지피는 밉살스런 마왕녀석. 죽.여.버.리.고. 싶.다. "아닌가?" 루퍼트가 빙글거리며 약을 올렸다. "아니야! " 셔릴은 루퍼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얼굴을 붉히며 루퍼트에게 다가섰다. 순간 루퍼트는 셔릴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로 넘어뜨렸다. "아,앗!" 셔릴은 놀라 팔을 빼려고 버둥거렸다. "그럼...오늘 자상한 선생님이 되어준 값을 받을까?" 루퍼트가 셔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루퍼트의 뜨거운 입김이 셔릴의 귀를 간지럽혔다. 루퍼트의 혀가 셔릴의 귀를 핥고 뺨으로 향했다. "하, 하지마!" 셔릴이 루퍼트를 뿌려치려고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루퍼트는 셔릴의 옷을 능숙하게 끌어내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마..흐윽.."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게 명령하지 말라고 했었지. 쯧, 인간들이란 언제나 일을 자초한다니까." 루퍼트는 뜨거운 숨결을 셔릴의 가슴에 뿜어대며 셔릴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루퍼트는 저항하는 셔릴을 무시하고 셔릴 안으로 돌진했다. 루퍼트의 욕망이 폭발했다. XXI. 라밀다의 방문 1 "다 그 녀석 때문이야.." 라밀다는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 인간이 깨어나고 난 후로 루퍼트님은 자신을 한번도 찾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라밀다가 노골적으로 하는 유혹에도 루퍼트는 라밀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라밀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벌써 아랫것들 사이에서는 라밀다가 루퍼트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입방정이 돌고 있었다. "으으으으으..." 라밀다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고 인간녀석이 루퍼트님을 잡아두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두고보자, 이래도 이 라밀다에게 넘어오지 않는지..." 라밀다의 얼굴에 색기어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루퍼트의 욕실에서 바쁜 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루퍼트의 목욕물이 식을까 모두들 총총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루퍼트님은 어디 계시냐?" 라밀다의 목소리였다. "저...저기....루퍼트님은 지금 입욕중이십니다.." 그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하녀가 대답했다. "누가 그것을 모른다더냐? 루퍼트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았느냐?" 라밀다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안개의 욕실에 계십니다만..." "진작 말할 것이지, 내 지금 그리로 가겠다." "라, 라밀다님... 루퍼트님께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시는..." "뭐얏!" 라밀다의 눈초리가 사납게 치켜 올려졌다. 눈이 독기를 띠었다. "이년이 뭐라 했느냐? 감히 니가 내 앞을 막아서?" 자신의 어머니보다도 더 나이가 든 여인 앞에서 라밀다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고서 네 년이 덤비는 게냐? 루퍼트님의 총애를 받는 내가 루퍼트님의 입욕에 함께 한다고 하여 니가 감히 나를 욕보이려는 게냐?" "그..그게 아니옵고..." 나이든 여인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조아렸다. "내 오늘은 특별히 용서하지만 한번이라도 더 이런 건방진 짓을 한다면 네년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알겠느냐?" "예...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흥, 진작 그럴 것이지..." 라밀다는 의기 양양하게 루퍼트의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퍼트는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일단 북쪽 변방마족들의 반란도 평정시켰고, 골치아픈 국정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갔다. 다만 레이 녀석이 가끔씩 회의 중간중간 자신을 째려보는 일이 늘긴 했지만.. 루퍼트는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레이 녀석... 꽤나 진심인가 보군... 마족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또각또각.. 발소리가 다가왔다. 물을 갈아주러 온 것이겠지. 향료를 풀어주러 왔거나. 루퍼트는 계속 눈을 감은 채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발소리가 다시 멀어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루퍼트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상대를 발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라밀다... 라밀다가 물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퍼트와 눈이 마주치자 라밀다는 농염한 웃음을 지으며 루퍼트에게 다가왔다. 물에 젖은 옷은 라밀다의 부풀어오른 육체를 여과없이 드러내 보였다. 터질듯한 가슴과 은은히 비쳐보이는 계곡, 온몸의 곡선이 농익은 여자의 매력을 발산했다. 라밀다는 루퍼트의 눈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문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어깨에서 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잠시 라밀다를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황한 쪽은 라밀다였다. "루,루퍼트님.." "아무도 없나?" 루퍼트가 소리높여 시중을 불렀다. "예..예..." 아까의 그 나이든 여인이 황급히 나타났다.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그것이..."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굽신거렸다. "데리고 나가라. 아니, 내무총녀께서 목욕이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방을 잘못 찾으신 모양이니, 다른 욕실로 안내해 드려라." "...... ... ..." 다음 순간 루퍼트가 들은 것은 발을 쿵쿵 울리며 욕실을 뛰쳐나간 라밀다의 소리였다. "어떻게...어떻게...이 라밀다가..." 라밀다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치욕을 처음이었다. 자신은 이 궁성 누구도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다니.. 이게 다 그 인간녀석 때문이다. 녀석이 깨어난 후로는 루퍼트님이 내게 관심을 주지 않으시니... ... 듣자하니, 그 인간 녀석, 루퍼트님의 노예라지...그럼... 건방진 노예는 어떤 벌을 받는지 알려주지. XXII. 라밀다의 방문 2 딸깍. 셔릴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들었다. 최근 루퍼트가 어디서 났는지 인간의 책을 몇 권 구해다 주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문에는 루퍼트 대신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매력적이면서도 어딘지 색기가 흐르는 여인이었다. 여자는 독기가 흐르는 눈으로 루퍼트의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셔릴이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지 기억났다. 이 여자... 루퍼트의 잠자리 상대다... 라밀다는 루퍼트의 침대에 앉아 있는 셔릴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감히... 루퍼트님은 정사가 끝난 후 누구도 자신의 방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 먹다온 인간 애송이 따위가 루퍼트님의 침대에... "너, 이?당장 나와!" 셔릴은 얼떨결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왜 이 여자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저...누구신지..., 무슨 일이신지요." 또 나왔다. 셔릴의 숙녀에게 예의지키기. 셔릴은 궁에서 교육받은 대로 라밀다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려 말했다. "감히...천한 노예 따위가 내 이름을 물어? 건방진 것! 말대꾸를 하다니... 흠...그래, 보아하니 그 반반한 얼굴로 루퍼트님을 유혹한 모양인데... 어쩐다..? 루퍼트님은 이제 네가 필요없으시다니... 이제 네 더러운 몸뚱아리로 루퍼트님의 침실을 어지럽힐 수도 없게 됐구나. 호호호호홋" 셔릴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삼키며 대답했다. "저는... ... 노예가...아닙니다... ..." "뭐야?" 라밀다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니가 노예가 아니라....흥, 듣던대로 건방진 녀석이로구나. 감히, 노예가 자신의 신분을 거부해? 앞으로 그 건방진 입을 맘대로 놀리지 못하도록 맛을 보여 주지. 끌고가라!" "옛!" 라밀다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서너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라밀다가 대기시켜 놓았던 모양이었다. "뭐...뭐야..." 셔릴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탈출하기도 전에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인가. 하지만 곧 억센 손힘에 잡혀 방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셔,셔릴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셔릴의 식사를 가지고 오던 다이가 놀란 눈을 뜨고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켜라, 죄인의 호송을 방해하고 싶으냐!" 라밀다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이는 겁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셔릴은 자신이 돌보아야 한다고 루퍼트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게다가 상대가 라밀다라면...라밀다는 지금 분명히 셔릴님이 죄인이라고 말했다. 죄인이라구? 이 방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는 셔릴님이... 죄인?... 다이는 라밀다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루...루퍼트님께...먼저... 말씀..." 라밀다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네깟 것이 감히 내 앞을 막아서?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더냐! 이런 건방진! 이제보니 너도 이 요망한 노예녀석과 한 패인 모양이구나!" "그..그,그런 거,것이 아,아,아..아니옵고..." "시끄럽다!" 찰싹. 라밀다의 손이 다이의 따귀를 올려 붙였다. 라밀다는 그러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지 씩씩대며 말했다. "건방진 것, 감히 누구에게 덤비는 게야! 이 더러운 천민 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다이는 라밀다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자신을 가격해 오는 주먹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편, 셔릴은 라밀다의 부하들에 이끌려 음습한 지하로 끌려 내려갔다. 유황의 썩은 냄새가 셔릴은 코를 자극했다. 라밀다의 부하들은 셔릴을 내려놓자 셔릴의 발목에 굵은 쇠사슬을 채웠다. 셔릴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건방진 노예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지. 이제부터 너는 궁성의 하수로를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감히 루퍼트님 쪽으로는 얼굴도 돌릴 수 없도록 해주지." 라밀다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와... ... 루퍼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순간 셔릴은 따끔한 감촉을 뺨에 느꼈다. 라밀다가 뺨을 치며 손톱으로 셔릴의 피부를 긁어 놓은 것이었다. "감히... ... 루퍼트님의 이름을 너 따위가 존칭도 없이 부르다니... 넌,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썩게 될 것이다. 다시는 루퍼트님을 뵐 수 없겠지....아니..이곳에서 며칠만 지나면 루퍼트님은 널 알아보지 못할 걸...호호호호호. 더럽고 냄새나는 노예 따위, 이곳에서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르는 거지." 라밀다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셔릴에게서 등을 돌렸다. 방을 걸어 나가던 라밀다가 무엇인가 생각난듯 다시 셔릴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한가지 잊은 것이 있군. 이곳의 노예감독은 너같은 노예들을 아주 좋아한다지? 재능을 잘 살려보도록 해. 다리 몇 번 벌리면 좀 편하게 남은 여생을 지낼 수도 있을 테니까. 호호호호호" "이...더러운 계집..." 셔릴은 라밀다를 행해 달려 들었다. 하지만... "짤그랑" 셔릴은 라밀다에게 닿기 전에 먼저 셔릴의 다리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셔릴의 다리를 잡았다. 셔릴은 더럽고 축축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라밀다는 그런 셔릴을 고소하다는 듯 내려보며 발을 옮겼다. 그때였다. "라밀다, 넌 이런 곳엔 발길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빠?" "그래. 웬 일이지?" "뭐...그냥... ... 언제나 제가 하는 일이죠. 노예와 하녀들을 감독하고... 오빠는 여기 무슨 일이죠? 아직도 수많은 귀족부인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면서... 이쁜 노예 계집들을 찾고 있나요?" "라밀다...라밀다, 넌 말 돌리는 데는 천재로구나. 뭐, 네 용무는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럼 올라갈까?" "그래요, 오라버니. 호호.." XXIII. 부름 아까부터 자꾸 귀에 익은 듯한 저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인데... 갑자기 셔릴이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레이! 레이!" 라밀다와 함께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던 레이가 멈춰섰다. 셔릴의 목소리에 파랗게 질린 라밀다는 레이의 팔짱을 끼고 다시 계단을 허둥지둥 올라가려고 했다. 레이가 라밀다의 팔짱을 풀어내며 말했다. "누군가 저기에 있는 것 같은데?" "호호..오라버니는 무슨... 그냥 시궁창을 청소하는 노예 아니겠어요?"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건방진 노예가 발악하는 것이겠지요. 무슨 상관이예요? 그냥 가요.. 이곳은 너무 춥고 더러워요.." 멀어지지마...레이... 나를 이곳에 두고 가지마...제발... "레이! 레이!" "시끄러워. 어느 놈이 이렇게 소란이야!" 갑자기 셔릴의 등뒤에서 불쑥 그림자가 나타났다. 셔릴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물...책에서만 보았던 마물이었다. 인간과 같은 체活訣嗤?털복숭이에 붉은 눈. 어금니. 안짱다리. 게다가 냄새가 지독했다. "켈켈켈켈...이게 뭐야? 새로운 노예인가?" 마물은 침을 흘리며 어기적 어기적 셔릴에게 다가왔다. 셔릴은 공포에 싸여 뒷걸음질쳤다. "켈켈..오랜만에 싱싱한 고기가 들어왔군...켈...이리 와라...나에게 잘 보이면 이곳 생활은 편하게 할 수 있지..." 셔릴은 어떻게든 마물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공포로 인해 굳은 몸은 주인의 의지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 ... 잘 못 들은건가?" 레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는데.. "아이, 오라버니. 거봐요. 자. 어서 올라가요. 제방에 가서 따근한 차나 한잔씩 하자구요. 으~ 이곳은 정말 구역질나는 곳이라니까요!" 라밀다는 쾌활하게 레이의 팔을 끌고 지상으로 향했다. "가...가까이 오지마! " 셔릴은 비명을 지르며 마물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셔릴의 발목에 묶인 쇠사슬이 쩔그렁거렸다. "켈켈켈..반항하는 모습도 귀엽군..." 마물이 침을 뚝뚝 흘리며 가까이 오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풍겼다. 뚝. 마물의 침이 셔릴의 얼굴에 떨어졌다. 벽에까지 몰린 셔릴을 마물은 손쉽게 자신의 몸 아래에 깔았다. "시, 싫어! 싫어! 살려줘! 레이! 레이!" "켈켈켈... 아무리 소리쳐도 이곳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아..." 옷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돌벽의 한기가 등을 타고 전해져 왔다. 셔릴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마물은 냄새나는 숨을 내뿜으며 셔릴의 다리를 비비적대고 있었다. 그 털이 난 손이 허벅지에 닿자 셔릴은 소름이 돋았다. 마물은 이내 흥분했다. 자신의 성난 페니스를 셔릴의 다리에 비벼 대더니 셔릴의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싫어..." 이것만은 싫어 제발, 누구든 와줘. 누구든 제발.. 누구든 와줘. 누구든 제발.... ...제발... "루퍼트! 루퍼트! 살려줘! 젠장! 루퍼트! 루퍼트! 흑..루..퍼..트..!" 셔릴은 울부짖었다. 토할 것만 같은 마물의 냄새... XXIV. 휴식 "...루퍼트... ...루..." 셔릴은 눈을 감고 숨을 멈춰보려 했다. .... ... 토할... 것..만... 같..아... 순간 배 위로 따뜻한 액체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셔릴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마물이... ... 피를 흘리며... 자신의 배위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칼을 들고 마물의 피를 뒤집어 쓴 루퍼트가 얼음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며 서 있었다. 셔릴은 루퍼트의 등 뒤에 서 있는 온몸에 멍이 든 다이를 보았다... ...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 ... ... 달콤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셔릴은 아버지 포프 국왕의 따뜻한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제가 마왕의 성으로 붙잡혀 갔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운 꿈... 포프국왕의 품은 따스하고 따스하고 따스해서 자꾸만 품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따뜻해... ... ... 셔릴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따뜻한 아빠의 품안... ... ...? 셔릴은 번쩍 눈을 떴다. 한동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넓은 가슴. 아빠의...? "으으으으앗!" 셔릴이 깜짝 놀라 몸을 빼려 하자 단단한 팔이 셔릴의 등을 둘러왔다. "좀더 자도록 해... 움직이지 말고... 이대로..좀더..." 루퍼트의 쉰 듯한 목소리가 나즈막히 귓가에 울렸다. 졸지에 루퍼트의 품안에 안긴 꼴이 된 셔릴은 얼굴이 빨개져 바둥바둥 댔다. "싫어! 싫어! 이거 놔!" 루퍼트의 팔이 더욱 세게 셔릴을 눌러왔다. "쉬어..." 그러더니 셔릴이야 버둥대든 말든 이내 고른 숨이 들려온다. 셔릴은 한숨을 쉬며 루퍼트의 품에 안겨있는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됐건 그것은 눈을 감고 있으면 지극히 편한 품안임에 틀림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 셔릴도 어느새 다시 곤한 잠이 들었다. 셔릴이 깨어나기전 루퍼트의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다. 셔릴을 끌고간 라밀다의 부하들은 모두 즉결처분되었고, 라밀다는 내무총녀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사실 루퍼트로써는 라밀다도 함께 처형하려 했으나 레이의 얼굴을 봐서 다만 궁정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도 셔릴이 깨어나지 않자 궁중의 의사들도 모두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레이가 루퍼트의 방을 방문한 것은 그때 쯤이었다. 레이는 창백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셔릴을 바라보며 정작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루퍼트였다. "레이... 이번 일은..." 아무리 라밀다의 잘못이라지만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기에 대화하기에는 껄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자넨 아무 잘못이 없어. 내 동생이지만... 정확히 이복동생이지만... 라밀다의 잘못이라는 것 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자네 성격에 라밀다를 살려준 것도... 내 얼굴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레이는 루퍼트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이 먼저 라밀다의 일을 말해버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 "...라밀다 녀석. 지나쳤지. 어릴 때부터 그런 면이 있었어.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크게 다칠 거라고 생각했었네..." "... ... ... " "뭐... 어쩌면 녀석, 조금은... 자네에게만은 진심이었던 모양이지. 울더군..." "... ... ... " "라블란스크 답지 않아. 우리 집안은 바람처럼 사는 집안 아닌가! 하하하하핫" 레이는 억지로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레이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루퍼트도 미소를 지었다. "라블란스크 답지 않은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레이?" ""무슨 소린가? 이 레이님이야 말로, 궁중의 귀부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재미로 살고 있는데." "자네도 이 인간 꼬마 녀석에게 일편단심이 아닌가...., 아닌가? 내가 잘못봤나?" 루퍼트의 얼굴에 심술궂은 기색이 어렸다. "루, 루퍼트! " "하하하하핫, 내가 바로 맞춘 거로군. 그러니까. 오늘도 요 꼬마 녀석이 걱정되서 온 것 아닌가." "무..무슨 소리..." 레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자네 얼굴이 빨개졌군. 이거 점점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방금도 꼬마의 얼굴을 훔쳐보지 않았나." "흠흠...들키고 말았군. 이거. 루퍼트 폐하의 눈치는 마계 제일이라니까! 그래, 사실 이쁜이가 눈에 밟혀서 말이지... 혹시 루퍼트 폐하가 학대하지나 않나 해서.." "하하하하하...그럼, 국정 회의 중에 그렇게 노려볼 때 이미 알아챘었지..하하.." 루퍼트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졌다. "그런데 루퍼트..." "응?" "자네... 정말로... 셔릴을 어떻게 생각하나?" "... 노예..." "진심으로..그렇게 생각하나?" "녀석은 나의 노예.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노예다." 레이의 질문이 진지한 것임을 안 루퍼트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왜...? 이유가 뭐지..." "... ... ... 몰라.." "... ... ..." "... ... ..." "하하, 루퍼트 폐하의 약점 발견! 폐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하올 줄로 압니다. 그럼, 신 물러가겠사옵니다." "레이!" "국정 회의 때 보자구!" 레이는 루퍼트에게 눈을 찡긋하며 방문을 등뒤로 닫았다. 그의 얼굴이 약간 씁쓸해졌다. "라밀다...넌... 절대 이길 수 없는 경쟁자를 만난것 같구나...그리고 나도... ..." XXV. 산책 "..여...여...여어기느은... ... 루...루..퍼트...님의.... 화....화원..이예요... .... 셔,셔릴님은 어...어...어떠언... 꼬,꽃을 조.... 좋아..하..세요?" 셔릴은 다이가 더듬대며-- 또 셔릴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혀가며--묻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따스한 저녁의 빛이 정원을 함께 산책하고 있는 셔릴과 다이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셔릴의 은빛 머리칼이 그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 빛났다. "... ... 글쎄... ..." 자신이 무슨 꽃을 가장 좋아했는지... ... 셔릴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 에모리의 궁에서 어머니가 가꾸시던 꽃들은 정말로 아름다웠었다. 그런데... ... 내가 무슨 꽃을 가장 좋아했었던가... ...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무슨 꽃을 가장 좋아했었던가... ... 마치... ... 먼 옛날의 일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쎄... ...." 셔릴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셔릴의 얼굴에 낮게 그늘이 드리웠다. 그런 셔릴과는 상관없이 루퍼트의 화원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짙은 향기를 흩뿌리며 피어나고 있었다. 처음... ... 이었다. 루퍼트의 궁으로 끌려온 후... ... 처음 방밖으로 나가도 좋다는 루퍼트의 허락이 떨어졌다. "다이는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셔릴은 애써 우울한 표정을 떨쳐내며 물었다. 어쨌거나--저 심술궂은 마왕 녀석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방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셔릴은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다정한 다이와 함께 산책이라면... ... 이런 시간을 우울한 생각으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 루퍼트에게 고맙다고... ... 생각했다. "저....저...저는... 주,주,주커리가..... 이..이뻐요." "주커리?" 처음 듣는 꽃이름이었다. "아,아니오... ... 주..주...주커리...가.." "... .... ...?" "주...주,주,주...주커리...가..." "주주커리...?" "아...아니오..." 다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흔들었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주주주커리?" "아..아,아니..." 알쏭달쏭 퀴즈를 하는 기분이었다. "<주주커리가>라는 꽃이다." "아... 루,루퍼트님." 다이가 놀라 허리를 숙였다. 반면 셔릴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제 익숙해져 버렸다. 저 존재감없는 마왕 녀석이, 어느 순간 자신의 곁에 서 있는 것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렸다. 혼자서 책을 읽을 때, 다이가 가져다준 식사를 먹을 때, 노래 부를 때, 깜박 잠이 들었을 때... ... 루퍼트는 어느샌가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마치 셔릴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주주커리가... ..." 셔릴은 그 꽃 이름이 마치 어떤 주문이라도 되는 양 따라해 보았다. "지금은 이미 다 져버려서 보여줄 수 없군." "주주커리가... ..." 묘하게 입안에서 울리는 꽃의 이름. 마음이 약간 밝아지는 듯 했다. "루...루,루퍼트님... ... 께서는... ... 자,자색... 노이트를 가,가장... 조... 좋아... 하,하세요..." 다이가 말했다. 노이트...? 여기 마계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모르는 것들... 짐작할 수 없는 것들... "저...저...저것이 노...노,노이트예요." 셔릴의 눈길이 다이의 손끝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인간계의 작약와 비슷한 꽃송이가 피어 있었다. 차갑게 흔들리는 그 꽃이... ... 루퍼트와 닯았다고 셔릴은 생각했다. ... ... 아름다웠다.... "노이트... ... 주주커리가..." 다시 한번 입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마법의 주문. 노이트... 주주커리가... 한번 중얼거릴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마법의 주문. 셔릴은 정원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다이. 가서 셔릴의 침실을 정리해라." 루퍼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싫어. 셔릴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루퍼트와 둘만 남겨진 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싫었다. 노이트. 주주커리가. 다시 한번 중얼거려 보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일까. 어디서 풍겨오는지 모르는 짙은 꽃향기가 셔릴을 어지럽게 했다. ... ...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루퍼트의 발소리를 의식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순간... 아찔했다. 빛 때문에... ... 눈이 부셨다. 셔릴의 다리가 순간 휘청하고 꺽였다. 턱. 뒤로 비틀거리는 셔릴의 팔을 차가운 손이 잡아왔다. 셔릴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단단하게 잡고 있는 루퍼트의 손이... ... 느껴졌다. 노이트...노이트... 주주커리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주문. "쌀쌀하군. 들어가는게 좋겠다." 바람에 날리는 긴 루퍼트의 머리카락이 셔릴의 뺨에 닿았다. "... ... ... " 셔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꽃향기가... ... 어지러웠다. "다음에 또... 나오게 해줄테니." 셔릴의 침묵을 거부로 이해한 루퍼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 ... ... " "...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노이트. 노이트. 노이트. 루퍼트에게 잘 어울리는 자색 꽃. 셔릴의 팔을 잡아 당기며 돌아가는 루퍼트의 귓가에 셔릴의 중얼거림이 다시 들려왔다. "노이트... ... 주주커리가..." "다음에... ... 주주커리가가 피면... ... ...성 밖 구경을 가지." 루퍼트의 낮은 소리가 말했다. 셔릴의 심장이 콕콕 쑤셔왔다. 짙은 꽃 향기... ... 때문이었다. XXVI. 기회 1 셔릴이 라밀다로부터 구출됐다 깨어난 후 루퍼트는 다시 셔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침대는 같이 썼지만 이전처럼 셔릴을 강제로 취하는 일은 없었다. 라밀다로부터 구출됐다 깨어난 그 첫 산책 이후 자색 노이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동안 셔릴은 몇 번 더 다이와 함께 루퍼트의 정원을 산책할 기회를 가졌다. 노이트... 를 보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셔릴을 위한 루퍼트의 특별배려였다. 물론, 철두철미한 루퍼트는 셔릴에게 만약 자신이 탈출한다면 다이가 대신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셔릴은 입술을 깨물고 루퍼트를 노려보다 제풀에 지쳐 다이와 함께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 가끔 레이가 꽃을 들고 셔릴을 방문했고, 루퍼트가 없는 틈을 타 셔릴의 귀에 이쁜이니 뭐니 하고 속삭이다 셔릴의 펀치를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레이가 가져온 "마계 최고의 술"을 마시며 초저녁부터 떠들썩하게 즐겼던 날이었다. "으음..." 셔릴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잠에서 깨어났다. 여느 때처럼 루퍼트의 긴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셔릴은 얼굴을 찌푸리고 루퍼트의 팔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원래 술을 잘 못하는 데다 레이가 마구 권하는 바람에 주량을 훨씬 넘겨 마신 것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셔릴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크러 뜨리며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침대 옆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은... 어슴프레한 빛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셔릴에게 알려주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쿵쾅쿵쾅. 셔릴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단검. 단검이었다. 붉은 수정이 손잡이에 박힌 예리해 보이는 단검이 빛을 받아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셔릴은 혹시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숨을 죽였다. 단검에 박힌 수정이 유혹하듯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루퍼트의 가슴이 위 아래로 고르게 움직였다. 저...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는다면... ... ... 셔릴은 스르르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셔릴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알코올이 루퍼트의 주의력을 흐리게 했음에 틀림없었다. 마왕... 죽여야 하리라. 자신이 영원히 인간계로 돌아갈 수 없다해도. 그가 자신에게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찢어죽인대도 시원치 않으리라. 셔릴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를 악물었다. 천번이고 만번이고 되뇌이지 않았던가. 내손으로 마왕을 죽이겠다고. 하늘이 주신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셔릴은 루퍼트를 내려다 보았다. 긴 흑발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오똑한 콧날과 꽃잎같은 입술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그 하얀 얼굴이 평온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셔릴은 단도를 번쩍 치켜 들었다. 셔릴은 단검의 명수였다. 단 한치의 실수도 없이 심장에 찔러 넣을 자신이 있었다. XXVII. 기회 2 "... ..." 셔릴의 손이 흔들렸다. 셔릴은 단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며 루퍼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깨어나기 전에 어서 죽여야해, 어서.' 이성이 재촉했다. '하지만...하지만... ' 하지만 한쪽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셔릴에게 속삭여 왔다. 셔릴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셔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왜...왜... 찌르지 못하는 거지... "... ...왜... 찌르지 않는거지?" 마왕의 목소리에 셔릴은 놀라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눈을 뜬 루퍼트의 보라빛 눈이 셔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처음부터 전부...?" 셔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고 있었나, 전부? 죽이려고 하는 것 알고 있었어? 왜? 가만히 있었지? 왜.. "단검에 자수정이 박혀 있지 않나. 자수정은 주인과 소통하지." 놀랄만큼 침착한 소리로 루퍼트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럼 왜 가만히 있었어! 날 놀리고 싶었던 거야? 그래...흐윽...날 비웃어. 널 찌르지 못한 날. 저주스러워. ..비웃으라구! 당신 뜻대로 됐군. 당신이 노리던 게 이거지? 날 비웃고 싶었던 거지!" 셔릴은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루퍼트를 찌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도 죽이고 싶었는데... 왜... "쉬...." 루퍼트가 일어나더니 셔릴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더니 루퍼트는 힘들이지 않고 셔릴의 머리를 끌어내려 아찔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셔릴의 눈물을 혀로 핥아 왔다. "흐..윽... 하지..마...개자식아..흐윽" 셔릴은 루퍼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쉬잇..." 이번에는 셔릴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어 끌어당겼다. 혼란스러운 감각 속에 그의 키스가 이어지고 셔릴의 숨결이 가빠졌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키스였다. 마치 셔릴이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되는 양 조심조심 루퍼트의 혀가 다가왔다. 셔릴은 저도 모르게 루퍼트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루퍼트는 셔릴의 저항이 차츰 줄고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한 순간을 정확히 짚어냈다. 루퍼트의 가슴을 밀어내고 있던 셔릴의 손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짜릿한 포옹 속에서 셔릴의 가슴이 그의 가슴에 짓눌렸다. 따뜻하고 고분고분한 몸이 루퍼트의 팔에 안겨 있었다. XXVIII. 욕망 2 루퍼트는 금세 흥분했다.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옴몸으로 욕망이 소용돌이쳤다. 안그래도 술 때문에 머리 속이 어지러운데 루퍼트는 지금 허리까지 알몸이었다. 손바닥과 가슴에 닿는 셔릴의 맨살의 감촉에 루퍼트는 머리속이 어지럽고 손끝이 따끔거렸다. 루퍼트는 셔릴을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셔릴의 눈에서 강한 두려움의 빛을 발견했지만 못본 척 했다. 루퍼트는 셔릴의 분홍색 젖꼭지를 입에 머금었다. 혀로 살금살금 그것을 가지고 놀자 셔릴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찌르르한 아픔과 함께 참을 수 없는 감각이 생애 처음으로 셔릴에게 밀려 들었다. 루퍼트는 조심조심 더욱 부드럽게 입술을 셔릴의 허리 쪽으로 옮겨갔다. 셔릴은 허리를 비틀었다. 이 감정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하...하학... 하지마...으응" 루퍼트가 일깨운 감정들은 셔릴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셔릴을 안고 있는 그의 손은 힘이 세어 금방이라도 허리를 두 동강낼 것 같았지만, 손길은 놀랍도록 부드러워 녹아들 것만 같았다. 따스하고 탄탄하고 노련한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살결 위를 움직이자 셔릴의 가슴이 요동치며 천둥소리를 냈다. 루퍼트가 셔릴의 분신에 입술을 갖다대자 셔릴은 놀라 튕겨 올랐다. "하, 하지마! 제발! " 셔릴은 울상이 되어 루퍼트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루퍼트는 셔릴의 팔을 어린아이 팔을 꺽듯 한손으로 잡아 올리고 다시 셔릴의 분신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슬슬 혀로 셔릴의 것을 놀리기 시작했다. "으흑... 아..하...지..마.... ..하악.." 셔릴의 입술에서 나직하게 한숨이 새어나오더니 팔을 내려 루퍼트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퍼트의 양손이 셔릴의 팔뚝을 쓸어내려 옆구리를 지나더니 엄지 손가락에 부드러운 셔릴의 가슴에 닿았다. 셔릴이 몸을 빼려고 하자 그는 양손을 셔릴의 등뒤로 가져가 셔릴을 안심시키며 다시 입술로 셔릴의 분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빠르고 격렬하게 밀려드는 욕망에 루퍼트는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껏 누군가를 위해 이런 일을 한다는 생각 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퍼트는 멈추지 못했다. 팔에 안긴 셔릴의 감촉이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셔릴은 울상이 되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감각. "그만...하윽... 그만해..." 셔릴은 허리를 비틀었다. 루퍼트는 셔릴의 말을 듣자 셔릴의 분신을 약하게 깨물었다. "아윽" 셔릴은 움찔하더니 루퍼트의 입안에 싸버리고 말았다. 죽고 싶었다. 더러운 마왕놈, 왜 오늘은 갑자기... 챙피해서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꿀꺽하고 정액이 루퍼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방이라. 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셔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퍼트는 셔릴의 분신을 감아쥐었다. 손끝에 하얀 정액이 묻어나자 루퍼트는 셔릴의 한쪽 다리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셔릴의 근육들이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단하게 조여진 셔릴의 애널이 드러났다. 루퍼트는 한 손가락을 셔릴의 애널에 삽입시켰다. 조인다. 너무 조인다. 겨우 손가락 하나 인데도 셔릴의 애널은 끊어버릴 듯이 조여왔다. 이대로라면 또 셔릴은 피를 흘릴 것이 틀림없었다. "아..읏.. 아파.." 셔릴의 신음이 들렸다. 루퍼트는 셔릴의 애널로 입을 가져갔다. "아..앗!" 셔릴은 애널에 닿는 갑작스런 혀의 감촉에 놀라 소리질렀다. "하, 하지마......아읏...더러워... 그마아..ㄴ.. 하지... 아읏" 루퍼트는 셔릴의 애널이 어느 정도 힘을 뺄 때까지 계속에서 혀로 셔릴의 애널을 희롱했다. 이윽고 루퍼트의 혀가 셔릴의 애널 속으로 들어갔다. 셔릴은 그 감촉에 어쩔 줄 몰라 버둥대기 시작했다. "하읏... 하지마... 제발...흐윽... 제발..." 루퍼트의 혀가 빠져나간다 싶더니 대신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들어왔다. 혀가 길을 넓혀논 후라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루퍼트의 손가락이 셔릴의 내벽을 살살 긁었다. 셔릴은 눈을 크게 뜬 채 숨만 색색거리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퍼트는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아읏....아파..." 셔릴이 다시 칭얼대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손가락을 살살 돌려 셔릴을 자극했다. "하..지마...하읏" 루퍼트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 닿았을 때 셔릴의 허리가 들썩 한 것을 루퍼트는 놓치지 않았다. "여긴가?" 루퍼트의 손가락이 계속 그곳을 공략하자 셔릴의 다리가 펴졌다 오무려졌다. 셔릴의 손이 시트를 움켜 잡았다. 루퍼트는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셔릴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셔릴의 고개가 괴로운 듯 도리질쳤다. 신음을 참고 있었다. 이윽고 루퍼트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셔릴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정말 이상해...' 순간 성난 루퍼트의 분신이 셔릴을 꿰뚫었다. 셔릴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애널이 ... 꽉 차는 느낌. 너무나 익숙한, 그럼에도 절대 익숙해 질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 아파... 하..지..마.." 루퍼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루퍼트는 셔릴에게 가볍게 입맞췄다. 차츰 고통이 가라앉았다. 루퍼트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페니스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앗...아..." 셔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루퍼트의 입에서도 욕망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루퍼트의 입술이 뜨겁게 굶주린 듯 셔릴의 입술을 덮고 셔릴도 마주 키스했다.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려고 기를 썼지만 굶주림은 더욱 치열해졌다. 셔릴과 루퍼트는 함께 절정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XXIX. 노이트 달콤한... ... 향기가 셔릴의 코를 자극했다. 아... ... 셔릴이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자색의... ... 노이트 꽃이 보였다. 언제부터 저 꽃이 저곳에 꽂혀 있었던가... ... 어쩌면 레이가 꺾어다 준 것 같기도 하였고... 다이가 가져다 주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아니... ... 그들이 가져다 준 것은 아이센트라는 작고 하얀 꽃이었던가...? 아른아른 생각날 듯... 기억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자신의 등 뒤에서 루퍼트의 단단한 팔이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고른 숨결이 자신의 머리칼에 느껴졌다. 옅은 어둠 속에서 노이트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잠깐 몸을 움직하던 셔릴이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순식간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너무나도... ... 익숙한... ... 통증... ... 그리고... 약간의... ... 기분좋음... .... "하... ..." 셔릴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동공이 어둠 속에서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갑자기 생각이 나버렸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자 셔릴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 혀를 깨물어 죽고만 싶었다. 어째서... 어째서... .... 자신이 미쳤음에 틀림없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 셔릴이 몸을 움찔거리자 반사적으로 루퍼트가 다시 팔에 힘을 주고 셔릴을 끌어당겨 왔다. 셔릴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익숙한 루퍼트의 체온... ... 하지만... ... 셔릴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루퍼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른... 숨소리. 다행이다... ... 깨어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셔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자고... 루퍼트가 깨어나면... ... 어떻게 ... 해야하지...? 어떤... ... 반응을 보여야... 하지....? 셔릴은 루퍼트의 팔 안에서 입술을 깨문 채,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노이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XXX. 설정 1 루퍼트는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셔릴은 그날 밤 자신과 관계를 가진 이후로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셔릴은 루퍼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져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루퍼트가 방을 나갈 때까지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루퍼트가 방에 들어가자 마자 베개가 날아왔다. 셔릴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신 따위, 죽.어.버.려." 루퍼트는 그후 몇 차례 셔릴의 뺨을 때린 것을 기억했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고 셔릴에게 빈정대기도 했다. 그리고 "네 신음소리... 듣기 좋았어." 라고 비꼬았을 때 셔릴의 표정은.... 명백히 ... 상처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후 셔릴은 루퍼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퍼트도 굳이 셔릴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후가 며칠 째 흐르고 있었다. 루퍼트는 소리를 내며 서류를 덮었다. 술한잔이 그리웠다. 그리고... ... 며칠 째, 저 침대 곁의 노이트에 마력을 거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실내에서는 자라지 않는 꽃이었기에 마력이 계속 해서 주입되지 않으면 시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 둔한 인간녀석이 노이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지 조차 의문이지만... ... 어쨌거나... 오늘은 다시 꽃에 마력을 주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의 방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면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퍼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루퍼트의 손가락이 떨려왔다. "설마... ... " 설마... 아니... 그럴 순 없어. 불가능해... 루퍼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땅이 흔들렸다. 그때 였다. 한 음영이 루퍼트의 눈 앞에 나타났다. "서, 설마..." 루퍼트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요...루퍼트님... 저에요." "..라밀다... ... " 라밀다가 두건 형태의 망토를 벗었다. 독기어린 눈빛. 그녀의 손에는 붉은 수정이 들려 있었다. 그 수정 한가운데 칼이 박혀 있었다. 수정은 그 중심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XXXI. 설정 2 "설마..." "설마가 아니예요... 당신의 수정 ... 내가 부쉈죠. 상상도 못했겠죠? 애를... 좀 먹었죠. .. 수정과 당신의 소통을 막기 위해... ... " "네가...감히..." 루퍼트의 분노한 표정에 라밀다는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 뒤로 물러섰다. 라밀다는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기 위해 온몸의 용기를 다 짜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당신이 그렇게 날 버렸지. 루퍼트... 그래서 생각했어. 내가 왕비가 될 수 없다면... 난, 여왕이 되겠어...여왕이 되겠다구..." 그때였다. 라밀다를 노려보다 마왕이 손을 라밀다 쪽으로 뻗는가 했다. "아악!" 순간 라밀다가 무엇엔가 맞은 듯 몸을 휘청였다. "우웁..." 라밀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이..이럴 수가..." 라밀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퍼트의 머리카락이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루퍼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루퍼트의 손바닥에서는 한가닥 섬광이 사그라 들었다. 라밀다의 어깨를 명중시킨 그 빛이었다. "커..흑... 이럴..수가..." 라밀다는 자신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넌 나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 루퍼트의 입에서 냉정한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루퍼트 역시 후들거리지 않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모아야만 했다. "그래요... 하...지..만....컥...나... 혼자는... 죽지않겠어... 저승길의 길동무로. ..루퍼트...당신..." 라밀다는 루퍼트의 수정에 꽂힌 칼을 뽑았다. "으윽..." 루퍼트의 얼굴에도 고통의 빛이 퍼졌다. 라밀다는 붉은 수정을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악! " 순간 라밀다가 앞으로 고꾸라 졌다. 그녀의 등에 칼이 박혀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밀다는 쓰러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오..빠..." 라밀다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레이가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루퍼트! 괜찮나?" 레이가 라퍼트에게 다가서는 순간.. 땅이 흔들렸다. 궁성의 벽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천장을 받친 기둥에서 조금씩 흙이 쏟아져 내렸다. 레이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루퍼트에게 다가섰다. "루퍼트!" "레..레이..?" "루퍼트..어서 여길 피해야 해. 어서!" 레이가 루퍼트를 잡아 끌었다. 루퍼트는 레이의 팔을 뿌리쳤다. 레이가 의아한 눈으로 루퍼트를 바라보자 루퍼트는 말을 하기 위해 숨을 잠깐 골랐다. "... 레이... 어서 빠져 나가. 마계의 다음 왕은 자네가 될거야..." "루퍼트! 무슨 말이야! 이 자식아! 어서 나가자구! 아직 늦지 않았어!" 루퍼트의 입술이 호를 그린다. "자넨 지독한 거짓말장이야... 한번 깨진 수정은 복구되지 않아...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쿨럭.." 루퍼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루퍼트! " "어서 피해, 어서, 왕의 명령이다. 레이마르 라블란스크 公, 주군으로써 마지막 명령이다." "루퍼트, 자네 없인 아무데도 가지 않아!" 레이가 안타깝게 절규했다. "루퍼트...지금이라도 함께 나가자... 내가 자넬 지켜 주겠어...알잖아. 마력이 없이도 살 수 있어... 알잖아!" "살 수 있어... ... ? 그것이 사는건가? 수정없이... ... 마력..없이... ... 사..는... 것이... ... 큭... ... 자네 ... 날... 알잖아.... 큭...그리고... " "... ... ... " 레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력없이 사는 것. 루퍼트에게는 그것이 지옥일 것이라는 것을 레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루퍼트가 비틀거리며 발을 옮겼다. "설마... 이쁜이...?" "...돌려 보내야 해..." 레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퍼트, 이 바보 자식아! 같이 가! 같이 가자구!" 루퍼트가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담한 미소였다. "왕에게 건방지게 구는군, 이건 벌이다." "안돼!" 레이가 루퍼트 쪽으로 달려가는 순간 눈부신 섬광이 레이를 감쌌다. 다음 순간 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쿨럭" 루퍼트가 다시 기침을 했다. 레이를 순간이동시키느라 생긴 마력의 손실이 루퍼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안녕. 레이. 안녕... .나의 친구..." XXXII. 설정 3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마력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셔릴을 돌려 보내야 했다. 루퍼트는 비틀대며 방으로 가기 시작했다. 루퍼트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지축이 흔들렸다. 루퍼트의 마력으로 지탱되던 궁이었다. 루퍼트가 소멸하는 순간 궁전도 소멸될 것이다. 루퍼트가 방문을 열었을 때 루퍼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셔릴의 모습이었다.. "어디 갔다 온거야! 멍청이..흑... 무슨 일이야!" 셔릴은 루퍼트를 향해 소리 질렀다. 루퍼트는 미소 지었다. 여전하구나... 이제는...이제는... 정말 보내 줘야 하겠지... "쿨럭" 루퍼트의 입에서 선혈이 새어 나왔다. 그제서야 루퍼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 셔릴이 루퍼트에게 달려 왔다. "이게... 뭐야? 왜...?" 셔릴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목소리가 떨렸다. "쿨럭... 이제 돌려보내 주지..." 루퍼트는 손에 든 자신의 수정을 들어 올렸다. 셔릴이 처음 이곳에 오던 날처럼.. . 수정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셔릴이 루퍼트의 수정을 잡아챘다. 루퍼트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셔릴은 수정을 손에 든 채 뒷걸음질쳤다. "싫어... 싫어..." 셔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루퍼트는 조급해졌다. 어서 보내지 않으면... "어서 내놔! 죽고 싶은가?" 셔릴은 루퍼트를 바라보며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미소지었다. 눈물 때문에 눈 앞이 흐려졌다. "싫어! 당신...죽이기 전까진 안가!" 생때였다. 루퍼트는 셔릴을 바라보았다. 셔릴도 루퍼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셔릴은 루퍼트의 수정을 루퍼트의 침대에 놓았다. 그리고 루퍼트에게 다가갔다. 루퍼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셔릴의 모습이 흐리게 보인다... 눈물인가... 셔릴의 모습이 흐리게 보인다. 루퍼트는 눈을 비볐다. 셔릴이 흐리다... 흐리다... 흐리다... 설마...크흑...루퍼트의 입가에서 냉소가 새어나왔다. 이런 건가... 베이닉스, 당신의 저주... 질기군... 결국 꼬마에 대한 내 마음이 이거였나...? 셔릴이 다가오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셔릴의 조그만 입술이 머뭇거리며 루퍼트의 입술에 와 닿았다. 맞받아 셔릴의 입술에 쏟아지는 정열은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루퍼트는 굶주린 사람처럼 셔릴의 입술을 제치고 맛보고 삼켜 버렸다. 어깨를 끌어안는 루퍼트의 손아귀 힘에 셔릴의 어깨에는 멍이 생길 지경이었다. 셔릴의 입술을 맛보면서 루퍼트의 양손은 미친 듯 셔릴의 등을 쓰다듬고 옆구리로 올라가서 가슴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에 이미 단단히 솟은 셔릴의 가슴이 만져졌다. 셔릴은 루퍼트를 떠밀며 고개를 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루퍼트는 다시 셔릴을 끌어안고 셔릴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루..퍼..트... 나도...나도..하게 해줘..." 셔릴이 눈물젖은 얼굴으로 애원했다. 우르르...어디선가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퍼트는 셔릴의 말대로 해주지 않고 고개를 숙여 셔릴의 젖꼭지에 입술을 댔다. 루퍼트는 옷 위로 셔릴의 가슴을 입술로 애무했다. 옷위로 느껴지는 셔릴의 작은 돌기를 루퍼트는 혀로 희롱하며 셔릴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셔릴이 신음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루퍼트의 눈물이 흘러내려 셔릴의 옷깃을 적셨다. 셔릴도 같은 식으로 그를 보고 만지고 싶었다. 루퍼트의 옷으로 손을 뻗는 셔릴의 손이 긴장으로 후들거렸다. 셔릴은 루퍼트의 옷을 어깨로부터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루퍼트의 단단한 근육이 뜨겁게 부풀어오른 것이 느껴졌다. 루퍼트의 옷이 셔릴의 옷과 같이 발치에 떨어지고 그가 셔릴의 양손을 손으로 덮으며 셔릴을 침대에 앉혔다... 루퍼트가 다시 끌어당겨 어깨와 가슴에 키스하자 셔릴은 다리가 떨렸다. 루퍼트는 욕망의 고삐를 조이려 애썼다. 지금 루퍼트는 셔릴을 차지하고 싶은 갈망이 온몸을 삼킬 지경이었다. 하지만 셔릴을 위해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그나마 그것이 셔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셔릴을 부드럽게 사랑함으로써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가 선택한 이 모든 것에서... 침대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 금이 갔다. 곧 방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셔릴과 루퍼트 모두 알고 있었다. 루퍼트의 손길과 입술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입술과 손끝으로 셔릴의 입술과 목덜미, 목과 어깨 사이의 예민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손길이 갈 때마다 셔릴의 몸이 긴장을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도 얕아졌다. 루퍼트의 입술이 목을 거쳐 셔릴의 맨가슴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셔릴의 내부에서 난폭한 욕망이 용트림했다. 짜릿하게 퍼지던 욕정이 불현듯 몸부림치며 분출구를 찾았다. 조용하게 속삭이던 숨결은 사라지고 관자놀이에 피가 맥박쳤다. "아...읏... 루... 퍼...트..." 셔릴의 입에서 조그맣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루퍼트도 셔릴의 변화를 알아채고 흥분했다. 짜릿한 전율 그 이상이었다. 욕정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보다 훨씬 거칠고 다급했다. 셔릴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고개를 젖히고 미친 듯이 키스하고는 셔릴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알고 있나...? 처음으로... 내..이름을 불렀어.." 루퍼트는 셔릴을 눕혔다. 그리고 이빨과 혀로 셔릴의 온몸을 헤집었다. 그의 혀와 손가락이 구석구석을 만지고 맛보는 동안 셔릴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올라 루퍼트가 하던 대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루퍼트의 근육이 불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에 취해서 그가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몸을 만지고 맛보고 자극했다. 루퍼트의 온몸이 욕망으로 줄달음질쳤다. 루퍼트는 느릿느릿 해나갈 생각이었다. 셔릴이 자청한 것이 처음이니만큼 최대한 부드럽게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욕정의 고삐가 풀린 지금 당장 셔릴에게 자신을 묻어 버리지 않으려고 자제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셔릴의 몸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키스해 가노라니 서로가 숨이 가빴다. 루퍼트는 나직하게 한숨 쉬며 셔릴의 분신을 입에 물었다. "아...하읏..." 셔릴은 신음을 토하고 몸부림쳤다. "아... 아읏...그만..." 셔릴은 손에 잡힌 시트를 움켜잡았다. 셔릴의 입에서 애원인지 항의인지 모를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지만 루퍼트는 더욱 애타게 몰아칠 뿐이었다. 쾌감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무자비하게 짜내는 그의 입술 앞에 셔릴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셔릴은 온몸을 헤집는 루퍼트의 입술 앞에서 몸이 굳었다. 욕망이 분출되기를 바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루퍼트는 셔릴의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능숙한 손, 짜릿한 입술, 그리고 다급한 혀. 그 모두가. 루퍼트가 셔릴의 다리를 부드럽게 들어올리는가 하더니 셔릴의 안으로 돌진했다. 셔릴 속에 폭풍처럼 흥분이 몰아치고 셔릴은 다리로 그를 감싸 안았다. 셔릴을 가득 메운 루퍼트는 자신이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다. 루퍼트는 격렬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으음..." 루퍼트의 입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하악...." 셔릴의 입에서도 달콤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이 순간 만큼은 천국이었다. 둘만의 천국이었다. "하... 하...악....읏...내가... 말...했..었.지...하읏.... 당신... 내..손으로... 죽...인..하읏..다고...결국....아...당신.... 아읏... 나 때문에...하읏...주..ㄱ..는.. 거지...아읏...학..." 셔릴이 루퍼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루퍼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셔릴의 얼굴을 제발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제발... ... 루퍼트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으려고 애썼다. "으..음... 나도...그랬지.... 으음...인간에게...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음..." 그는 입술 사이로 토하듯 속삭이며 셔릴의 입술을 덮고 미친 듯 절정의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아... ... " 우르르. 축대가 더이상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두 사람 위로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루퍼트의 궁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슬픈 사랑에만 빠지도록 ... ... 설.정. ... ...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도 슬픈 결말로만 끝나 버리도록 처음부터 ... ... 결.정. ... ...되어 있어. ************************************************************